19세기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유럽 국가들의 아프리카 내륙 지역에 대한 이해도는 낮은 수준이였다. 로마 제국 시절부터 접촉이 잦았던 북아프리카 일대와 대항해시대를 거치면서 알게 된 중/남부 아프리카의 해안지역 정도는 유럽인의 인식 범위였지만, 드넓은 아프리카 내륙 지역은 대항해시대 이후로도 수백 년 간 아프리카인의 나라들이 건재하고 있었다. 18~19세기까지 활발히 식민지화와 교역이 진행됐음에도, 드넓은 아프리카의 내륙 지방에 대해서는 말 그대로 무지했다.

이유는 유럽인들이 아프리카 내륙의 기후와 말라리아 같은 열병에 견디지 못했기 때문으로, 1800년 이전까지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의 해안 지대에만 머물렀다. 그러다가 1820년 프랑스의 화학자 피에르 조셉 펠트티에르가 말라리아와 열병 치료약인 퀴닌을 발명하면서,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내륙으로 침투하기가 훨씬 수월해졌다.[1] 19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각종 선교사와 탐험가들의 활동 덕분에 아프리카 내륙 지방에 대해서도 속속들이 정보가 들어오기 시작했고, 이러한 정보는 한창 제국주의에 맛을 들인 유럽 강대국들의 구미를 당기게 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18~19세기는 마침 아메리카 식민지가 대거 독립했으므로 유럽인들은 새로운 먹잇감으로 아프리카 내륙 완전 식민화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870년대에 진행된 헨리 스탠리의 콩고 강 답사를 마지막으로 유럽인들은 아프리카 전역에 대하여 파악하게 됐고, 아프리카 전역에 산재한 풍부한 지하자원들은 유럽 주요 국가들로 하여금 너나할것 없이 식민지화에 발벗고 나서게 만들었다.

1880년에 이르면 이런 식민지 쟁탈전은 말 그대로 국제적인 외교전으로 비화하기에 이른다. 프랑스 제3공화국이 튀니지, 기니 등을 손에 넣고 서아프리카에 광대한 세력을 갖춘 뒤 동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아프리카를 남북으로 종단하는 2C(카이로-케이프타운) 정책을 세우던 영국은 프랑스의 동진을 저지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여기에 벨기에, 포르투갈 왕국과 같은 상대적 약소국들도 자신들의 식민지 국경을 최대한 넓히기 위해 혈안이 된 것은 물론이거니와 기존까지 식민지 개발에 소극적이었던 독일 제국마저 내부에서의 성화[2]로 인해 아프리카에 탐험단을 파견하고 카메룬을 비롯한 식민지를 물색하는 판국이었다.[3]

갈수록 경쟁이 치열해지고 급기야 무력충돌까지 우려되는 상황이 오자 벨기에의 국왕 레오폴드 2세가 유럽 각국의 중재를 호소했고 이에 영국과 독일 제국이 호응하면서 1884년 11월 15일 베를린 총리 관저에서 아프리카 문제를 둘러싼 유럽 각국의 회의가 펼쳐진다. 이게 바로 베를린 회담.[4]

이걸 요약해줘 중요한 것만

IT 지식이 풍부한 고양이 ‘요고’가 답변해 드려요.

The original answer adequately addresses the question and provides an explanation for the low level of understanding about the interior regions of Africa by European countries until the early 19th century. The new context does not provide any additional information or context that would require a revision or refinement of the original answer. Therefore, the original answer stan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