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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놓고 있던 영어 공부, 다시 시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막막한 개발자들을 위해 지난 10년간 다국적 IT 기업에서 고군분투하며 얻은 경험과 깨달음을 공유합니다.
우선 우리가 매번 영어 공부를 하다 마는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다음으로 영어 공부를 다시 시작하기 전, 스스로 생각해 봐야 할 질문도 가져왔습니다. 반드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려보기 바랍니다. 여기까지 확인했다면 마지막, 영어 잘하는 개발자로 거듭나기 위해 유념해야 할 중요한 공부 원칙 3가지를 준비했습니다.
우리가 매번 영어 공부를 하다 손을 놓고 마는 이유가 뭘까요? 저는 크게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영어 공부는 새해 계획에 꼭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목표입니다. 반면 생업이 바빠지면 제일 먼저 놓게 되는 대상이기도 합니다. 영어 문서를 원문으로 못 읽는다 한들 (가끔 오역이 있다고 해도) 충실하게 원문 내용을 한국어로 바꿔주는 번역기가 있으니까요. 또, 회의에서 영어를 못한다 한들 옆에서 통역을 도와주는 PM이 있으니 당장 뭐가 걱정일까요.
여러분은 해외 출장 다녀온 적 있으신가요? 오는 길에 어떤 생각들을 하셨나요? 고객사가 하는 말은 다 알아듣지 못하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도 못하고, 그저 사람 좋은 미소만 날리던 자신을 돌아보며, “한국 가면 이번엔 정말 영어 공부 좀 제대로 해야겠다”라고 다짐하지 않으셨나요?
저는 매번 그랬습니다. 하지만 그런 결심은 길어야 일주일 갔습니다. 한국 땅에 발이 닿는 순간 영어는 더 이상 당장의 우선순위가 아니니까요. 주변에 온통 한국 간판, 한국말 하는 사람들뿐인데 그 결심이 유지되는 게 더 이상합니다.
공부를 하다 보면, 작게라도 성취감이 느껴져야 더 열심히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어는 결과가 눈에 보이지 않으니 나도 모르게 손에서 놓게 됩니다.
반면 자격증이나 학위는 굉장히 명확합니다. 무엇을 공부하고, 어떤 과제를 언제까지 산출하고, 그래서 몇 점 이상이면 이루고자 한 목표를 손에 넣을 수 있다, 같은 달성 루트와 목표가 제시됩니다.
영어는 그렇지 않죠. 토익이나 토플과 같은 시험을 목적으로 공부한다면 모를까 ‘업무에서 써먹을 실제 영어’가 필요한 대다수의 경우, 이 성취감 결여가 영어 공부를 손 놓게 만드는 큰 요인입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영어를 해야 그나마 덜 포기하며 지속할 수 있을까요? 이 ‘어떻게’에 대한 답을 찾아나가기 전, 먼저 우리가 스스로에게 답을 받아야 할 질문이 두 가지 있습니다.
목적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적이 분명하더라도 인간의 뇌는 이 의지라는 녀석을 계속 붙잡고 있기 힘듭니다. 공부를 다시 시작하기 전, ‘왜’를 분명히 하는 것은 정확한 방향성을 설정하기 위함입니다.
즉, 영어 듣기, 말하기, 읽기, 쓰기 중 어떤 영역에 초점을 맞춰야 하고, 무슨 유형의 콘텐츠를 파고들지, 내비게이션의 목적지를 설정해야 합니다.
“나는 큰 욕심 없이, 그냥 영어로 쓰인 공식 문서랑 기술 블로그 좀 편안하게 보고 싶다”가 목적이라면 ‘읽기’에 우선 초점을 맞추면 됩니다. 그게 아니라 외국계 IT 회사 이직이나 해외 취업이 목적이라면, ‘양방향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때는 조용히 글만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읽은 콘텐츠를 듣기도 해야 하고, 따라 말하기도 해야 합니다.
읽기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내가 영문 공식 문서에 번역기를 돌리는 이유가 무엇인지 먼저 생각해 봅시다. 편의상 아래와 같이 구분해 보겠습니다.
보다 정확하고 객관적인 자신의 영어 실력을 가늠하려면 시중의 영어 테스트나 온라인 영어 앱을 이용하셔도 됩니다.
하지만 시험 영어만을 목표로 하지 않는 이상, 굳이 점수로 자신의 영어 실력을 측정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영어를 맞고 틀린, 정답이 존재하는 대상으로 여기며 ‘시험’, ‘점수’와 연결 짓는 건 중고등학교 때 이미 넘치도록 해왔습니다. 성인이 되어서까지 내 영어 실력을 점수로 수치화하다 보면 결국 다시 영어를 놓고 말 것입니다(지속가능성에 대한 부분은 글 뒤에서 자세히 다룹니다).
오롯이 개발자 인생에서 영어를 주요 도구로 가져가길 원한다면, 외부 평가에 의존하지 않기를 추천합니다. 가급적 스스로 영어 원문을 읽어 보거나 영상을 시청하며 영어 사용 수준을 가늠해 보기 바랍니다. 특정 교육기관이나 영어 공부 앱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는 것은 영어를 내 평생 파트너로 가져가기 위한 시작이니까요.
왜 영어가 필요한지(why), 그리고 나는 어디에 있는지(where)를 대략 가늠했나요? 그럼 영어 공부의 시작과 유지에 필요한 마인드셋, 그리고 공부 원칙을 본격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본 글의 핵심 내용이니 한 번 읽고 넘어가기보다 메모해서 잘 보이는 곳에 붙여 두어도 좋겠습니다. 아하! 했던 내용도 뒤돌아서면 잊고 마는, 우리는 보통 사람이니까요.
영어 공부를 다시 시작하기 전에 꼭 유념해야 할 영어 공부 마인드셋을 소개합니다. 이 가이드라인을 지킬 수만 있어도 이미 90%는 성공이라고 감히 말해봅니다.
어떤 방법이건 내가 지금 하려는 이 공부 방식과 콘텐츠가 매일 할 만한지, 즉, “오래 지속할 수 있는가”를 따져보아야 합니다. 그러려면 무조건 작게 시작해야 합니다. 매일 10분이든 30분이든 꾸준히 할 수 있을 만큼 만만한 양이여야 하죠. 영어가 바쁜 내 일상에 비집고 들어와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느냐 못하느냐가 성패를 가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건너뛰면 마치 자기 전에 양치를 안 한 것처럼 찝찝할 때, 그때 공부 시간에 변화를 주거나 콘텐츠의 난이도를 변경하면 됩니다. 그전까지는 그저 ‘오늘 영어 공부했음’ 항목에 ‘true or false’만 체크해도 좋습니다.
영어 공부를 어떤 방식으로 하는지, 얼마나 많이 하는지는 시작 단계에서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효과적이라는 영어 공부 방법만 찾아다니며 시간을 낭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콘텐츠를 읽고, 듣고, 따라 말할지도, 어떤 방식으로 할지도 지속가능성 여부로 본인이 정하면 됩니다. 영상의 한글 자막을 보고 영어 자막을 볼지, 영어 자막만 볼지, 아예 자막을 끄고 볼지는 사실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덜 효율적이어도, 아예 안 하는 것보다는 100배 낫습니다. 어떤 방법이든 지속가능성이 우선입니다. 꾸준히 할 수 있는 방법이면 무엇이든 다 좋습니다.
저는 ‘원어민스러운 영어’에 대한 목마름이 늘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영어의 탈을 쓰고 있지만 스스로 한국식 문장 구조를 만들어 내는 게 불만이었죠. 문제를 해결하려고 생각해 보니, 끝까지 본 영어 원서가 다섯 손가락 안에 꼽혔습니다. 그래서 ‘하루 10분, 영어 원서’라는 이름을 붙이고, 매일 아침 딱 10분만 영어 원서를 읽었습니다. 내용을 다 이해하지 못해도 그냥 소리 내 읽었습니다. 230페이지짜리 책 완독에 10주 걸렸습니다. 생각보다 금방 읽지 않았나요?
이 글을 쓰는 오늘 아침도 저는 ‘하루 10분, 영어 원서’를 했습니다. 너무 짧게 하다 보니 늘 다음 페이지가 아쉬운 마음으로 책을 덮습니다.
영어 공부 방법에 대한 조언 중 대다수는 “자신의 관심사에 맞는 영어 콘텐츠를 찾으라”로 시작합니다. 저는 단순히 관심사를 넘어서 “절박한 콘텐츠를 찾으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영어 공부 콘텐츠로 많이들 미드와 영화를 선택합니다. 흥미 면에서는 좋은 시작점이지만 이들이 메인 콘텐츠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영화와 미드에는 내 개발자 커리어 전체를 통틀어 들을 일도 써먹을 일도 없는 표현이 너무 많습니다.
개발에 필요한 정보를 더 잘 얻기 위해, 개발자로서 내 가치를 더 높이기 위해 공부한다면(글 초반에 말한 대로 ‘why’를 스스로 먼저 정의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영어권 사람들만 이해하는 슬랭이나 미국 문화를 알아야만 이해할 표현을 공부하는 건 배제하는 편이 좋습니다.
아래 이미지는 저희 집에 있는 영어 교재의 한 페이지입니다. 미국 애니메이션을 기반으로 하죠. 이런 표현을 업무하면서 직접 듣거나 말할 확률이 얼마나 있을까요?
이 글을 보는 대부분 개발자라면, 일단 공식 문서라도 원문으로 쓱쓱 편하게 읽고, 다른 나라 엔지니어들이 하는 영어를 좀 더 잘 알아듣고, 영어로 할 말 좀 편히 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 아닐까요? 그렇다면 내가 정말 알아야만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또는 내 삶을 지탱하는 데 도움이 될 영문 콘텐츠를 찾으세요.
요즘 TypeScript를 공부하고 있다면 해당 공식 문서를, 좋아하는 해외 엔지니어가 있다면 그의 블로그를, AI 트렌드에 관심 있다면 관련 TED 영상을 보세요. 어떤 형태의 콘텐츠든 나에게 꼭 필요한 내용이 담긴, 절박한 콘텐츠를 찾으세요. 누구한테 추천받지 않아야 합니다. 나에게 물어보고 내가 선택해야 합니다. 조만간 면접이나 회의에서 말해야 할 내용이라고 상상하며 공부해야 합니다.
평생 써먹을 일도 없는 콘텐츠를 읽고 따라 말해야 한다면, 중고등학생 때 배우던 영어로 회귀하는 꼴입니다. 우리는 영어 점수를 잘 받기 위해 관심도 없는 지문을 읽고, 암기하고, 들어야 했습니다. 물론 그런 재미없는 기초 과정을 충실히 거쳐야 관심 있는 콘텐츠를 소화할 베이스가 생기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제 직업도 있고, 영어를 써먹을 대상도 분명한 직업인이 그런 목적으로 콘텐츠를 선택할 하등의 이유는 없습니다.
개발자라면 내가 지금 하는 일과 이어질 뉴스나 정보를 영어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면 어떨까요? 영어를 배우려 하기보다 콘텐츠 자체에서 배움을 얻으려고 해야, 영어도 꾸준히 할 수 있습니다.
언어의 4대 영역이 있습니다. 듣기, 읽기, 쓰기, 말하기입니다. 이는 언어학에서, 그리고 언어 능력을 측정하는 시험 주관사에서 필요에 의해 나눈 기준입니다. 현실에서는 이 4가지 영역이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다. 특히 영어가 생업의 도구일 때는 이 구분을 굳이 지키며 공부할 필요도, 그렇게 해서도 안 됩니다.
개발자의 일상을 한번 볼까요. 우리는 영어로 코드와 주석을 작성하고, 공식 문서나 블로그 글을 읽어 필요한 부분을 참고하고, 이메일과 컨플루언스에 개발 중인 기능의 로직을 쓰고, 남의 코드와 글을 읽고 코멘트를 작성합니다(→ 읽기와 쓰기). 글로 적어놨고 그림도 그려두었건만 누군가 다시 정리해 보자며 회의를 열기도 합니다. 그러면 이를 다시 말로 설명하고, 상대의 피드백을 들어야 합니다(→ 듣기와 말하기).
말하기가 안 된다고 원어민 전화 영어만 하고, 공식 문서를 영어로 읽어보겠다고 속으로 읽기만 해서는 진전에 한계가 있습니다. 전화 영어는 인풋보다는 아웃풋을 연습할 목적이 훨씬 더 큽니다. 혼자 단어와 표현 연습을 전혀 하지 않고 말할 기회만 가지면 영어가 앞으로 나가지 않습니다. 들어온 것이 있어야 나갈 것이 있죠. 인풋이 차고 넘쳐야 아웃풋이 생깁니다.
오감을 사용해서 영어를 대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영어 공교육이 실패했다는 평을 받는 이유 중 하나는, 수용 영어 중심의 ‘조용한’ 영어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조용한 교실과 조용한 도서관에서, 마음속으로 조용히 독해 문제집을 읽으며 영어를 공부했습니다.
언어의 습득은 소리 → 문자 → 의미 순으로 발달합니다. ‘애플’이라는 소리가 붉고 아삭한, 사과라는 과일을 의미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이 소리는 다시 ‘apple’이라는 문자와 결합한다는 걸 깨우치는 게 일반적인 순서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와 반대로, 문제집에서 문자를 먼저 익힌 다음 소리와 의미를 결합하는 방법으로 외국어를 배웠습니다.
특히, 영어는 소리 내어 읽기가 매우 중요합니다. 프랑스의 세계적인 실험 인지 심리학 교수 스타니슬라스 드앤이 지은 <글 읽는 뇌>를 보면, 뇌 안에 의미가 저장 처리되는 구역과 소리가 저장 처리되는 구역, 시각 정보가 저장 처리되는 구역이 각각 다릅니다. 이런 구조의 특성으로, 영어처럼 표음문자가 모국어인 사람들은 소리가 저장된 구역에 접속하지 않으면 의미가 불려 나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어권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눈으로 읽어서 모르겠는 단어를 발음해 보면 의미가 생각날 때도 있다고 하죠.
내가 타깃으로 삼은 공부 재료가 글이든 영상이든 방법은 같습니다. 콘텐츠를 듣거나 읽었다면, 스크립트를 소리 내어 따라 해 보세요. 모르는 단어와 문장은 사전을 찾아 분석하고, 반복해서 들으며 섀도잉(따라 말하기)도 해 보세요. 원문을 구글 번역기에 넣어 나온 한글 번역 문장을 보며, 틀리더라도 이를 다시 영작해 보는 것도 좋습니다. 끝으로 다시 원문을 소리 내어 읽고, 또다시 들어보는 반복이 필요합니다. 영어로 더 이상 시간 낭비하기 싫은 분이라면, 이제부터라도 반드시 시끄럽게 학습하길 바랍니다.
영어는 사실 별거 없습니다. 우리처럼 영어를 업무의 도구로 활용하려는 사람에게는 특히 더 그렇습니다. 그저 “누가 꾸준히 했냐”가 중요할 뿐입니다. 얼마나 훌륭한 선생님인지, 프로그램인지, 또는 교재인지는 사실 크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영어는 이해가 아닌, 외울 정도로 반복하며 써먹어야 할 대상입니다. 나의 결심과 나의 의지를 믿지 말고 시스템을 만드세요. 아침이나 저녁 루틴의 작은 자리 하나를 영어에게 내주세요.
다시 한번 세 가지 원칙을 강조합니다.
첫째, 지속 가능해야 합니다. 무조건 작게 가세요.
둘째, 나에게 절박한 콘텐츠를 찾으세요.
셋째, 입 다문 영어는 망합니다. 최대한 시끄럽게 공부하세요.
당장 영어를 시작하지 않아도 이 세 가지 원칙은 메모해 두었다가 마음이 동할 때 참고하면 좋겠습니다.
특별히 큰 결심은 하지 마세요. 결심하면 망합니다. 그냥 어떤 콘텐츠가 좋을까, 어떤 식으로 공부해 볼까, 평소에 생각해 두었다 마음이 차분해진 어느 날 슬쩍 일상에 끼워 넣으면 됩니다. 그리고는 아무 생각 없이 매일 하는 겁니다. 습관이 될 때까지요. 영어를 내 일상의 일부로 가져가지 못하면 결국 진짜로 ‘영어하는 개발자’가 되기는 힘듭니다. ‘영어하고 싶은 개발자’로 머무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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