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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세계적인 IT 역사의 흐름은 본 시리즈 10편에서 이야기한 인류 공동의 두뇌인 인터넷 시대가 본격적으로 개막된 것이 가장 주요한 특성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대중들에게, 그리고 인류사 전체를 볼 때도 매우 뜻깊은 일이었지만 세기말, IT 역사의 이면에는 상대방을 적으로 규정하고 종말 시키기 위한 치열하고 냉혹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도 또한 하나의 흐름입니다. IT 비즈니스 관점에서 볼 때 1990년대는 표면적으로 드러난 현상으로는 압도적인 윈텔의 시대였습니다. 지금은 기부 활동으로 그러한 이미지가 많이 씻어졌지만 당시 악의 제국으로 불렸던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와 앤디 그로브가 이끌던 인텔의 마이크로프로세서의 환상적인 콜라보가 전 세계를 점령하던 시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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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정신 IT 열세 번째. 세기말의 IT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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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세계적인 IT 역사의 흐름은 본 시리즈 10편에서 이야기한 인류 공동의 두뇌인 인터넷 시대가 본격적으로 개막된 것이 가장 주요한 특성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대중들에게, 그리고 인류사 전체를 볼 때도 매우 뜻깊은 일이었지만 세기말, IT 역사의 이면에는 상대방을 적으로 규정하고 종말 시키기 위한 치열하고 냉혹한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도 또한 하나의 흐름입니다. IT 비즈니스 관점에서 볼 때 1990년대는 표면적으로 드러난 현상으로는 압도적인 윈텔의 시대였습니다. 지금은 기부 활동으로 그러한 이미지가 많이 씻어졌지만 당시 악의 제국으로 불렸던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와 앤디 그로브가 이끌던 인텔의 마이크로프로세서의 환상적인 콜라보가 전 세계를 점령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지나온 과정을 아주 간단하게 살펴보면, 1970년대 빌 게이츠는 게리 킬달과의 운영체제 전쟁 1라운드에서 승리하여, 게리 킬달의 CP/M 운영체제를 베낀 소프트웨어를 구매하여 MS-DOS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영광과 부를 모두 빼앗겨버린 게리 킬달은 이 일로 죽을 때까지 MS를 저주했고 우울증에 시달리다 4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술집에서 쓰러져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게리 킬달의 죽음

 

운영체제 전쟁 2라운드는 윈도우에 관한 아이디어를 빼앗긴 스티브 잡스와 팔로알토연구소와의 소송이었는데 여기서도 역시 빌 게이츠는 승리했고, 세계 최고의 부호로 등극할 수 있었습니다. 빌 게이츠에게는 3라운드가 남아 있었는데, 이것은 이전의 전쟁과 성격이 완전히 다른 것으로 경쟁이 아니라 경쟁을 해체해버리는 새로운 방식의 싸움이었습니다. 빌 게이츠의 3라운드를 살펴보기 전에, 인텔의 경우를 먼저 살펴보면 앤디 그로브의 인텔은 형제간의 전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두 업체의 창업자가 모두 동일한 모태 회사인 페어차일드 반도체 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인텔 VS AMD

앤디 그로브와 빌 게이츠는 윈텔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낼 만큼 사업에 있어서 찰떡궁합이었는데, 두 사람이 경쟁자를 종말 시키는 방법도 매우 닮아 있었습니다. 막대한 자금력과 장기적인 소송을 통해서 상대를 말려 죽이는 방식이었으니 어쩌면 앤디 그로브가 절친 빌 게이츠를 벤치마킹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겠네요.

 

앤디 그로브는 IT혁명의 영웅들 편에서 이야기했지만 대내외적으로 편집광적인 기질과 냉혹한 사업가의 어두운 측면도 있지만, 최고의 CPU를 빠른 속도로 저가에 출시하는 등 IT 시장에 기여도 많이 했습니다. 2016년 앤디 그로브가 세상을 떠났을 때, 빌 게이츠는 그를 20세기 가장 위대한 비즈니스 리더라고 칭송했고, 자신은 앤디 그로브와 일하는 것을 사랑했다고 추모했습니다. 참고로 게리 킬달이 사망했을 때는 홍보 담당 직원을 대신 보내서 PC업계의 손실이라고 짧은 추모사를 읽게 했다고 합니다.

 

본론으로 돌아와 페어차일드 반도체의 연구원이었던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 무어는 1968년 인텔을 창업했고, 일리노이 대학교 공과대학 출신으로 페어차일드 반도체의 능력 있는 사원이었던 제리 샌더스는 1969년 AMD를 창업하였습니다. 페어차일드 반도체 출신으로 실력을 인정받아 두 창업자에 의해 영입된 앤디 그로브는 1987년부터 CEO가 되어 인텔을 이끌어왔습니다.

제리 샌더스
제리 샌더스 (출처: 위키백과)

 

자금이나 인력, 기술 모든 측면에서 뒤졌던 AMD는 처음에는 자체 기술력을 확보하지 못하고 선발 업체 제품의 사용권을 획득해서 사업을 운영하는 세컨드 소싱 방식을 취했습니다.

AMD는 1980년대 초반 IBM의 중재로 인텔의 특허 사용권 계약을 취득해서 사업을 하고 있었는데, 1980년대 후반 인텔이 갑자기 계약을 파기했고, 이때부터 두 업체의 소송전이 시작되었습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일본 반도체 기업들이 약진하면서 염가에 메모리 반도체를 공급했고, 이에 인텔은 사업을 전면적으로 마이크로프로세서 중심으로 개편하게 됩니다.

 

인텔은 1980년대 중반 386 컴퓨터의 CPU인 80386 프로세서에 대해서 AMD에 기술 이전을 해줄 것처럼 말하면서 시간을 질질 끌었고, 2년 간을 인내한 AMD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법원에 중재를 요청했습니다. 그제야 인텔은 세컨드 소싱을 해주지 않겠다고 명확하게 밝혔고, AMD는 이에 소송을 제기했습니다.1992년 법원은 인텔의 계약 위반으로 배상금과 기술 이전을 명령했으나 인텔이 상고하여 다시 재심에서는 인텔의 승리로 끝났고, AMD가 다시 상고하여 1994년 대법원에서 1심의 원심을 확정하여 AMD가 최종적으로 승리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80486 CPU가 시장에 출시될 정도로 시간이 흘렀으니 이미 인텔은 386으로 엄청난 매출을 올린 이후였습니다. 소송하는 동안 AMD는 80386 CPU를 자체 개발했을 정도였으니 AMD로서는 전혀 이익이 없는 상처뿐인 승리였습니다.

CPU

이외에도 인텔은 AMD가 개발한 제품에 대해서 상표를 비롯하여 특허 침해 등등 사사건건 소송전을 벌여서 AMD를 곤란에 빠뜨렸습니다. 1995년 앤디 그로브가 최고 경영자 자리에서 물러나고, 양 사의 CEO가 모두 바뀌면서 더 이상 소송을 벌이지 않는다는 합의를 발표했지만, AMD는 이미 소송 비용만으로 매년 수천만 달러를 지출하여 엄청난 출혈을 겪은 뒤였습니다. 1990년대 인텔의 명성은 이렇게 경쟁업체의 피를 밟고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윈도우 VS 리눅스

1970년대 중반, 실리콘 밸리에는 젊은 IT 마니아들, 해커, 엔지니어들의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 모임의 이름은 홈 브루 클럽이었는데, 애플의 창업자인 스티브 워즈니악을 비롯하여 훗날 유명한 IT 기업가와 전문가들을 많이 배출하였습니다. 이 모임은 IT 기술, 프로그래밍, 소프트웨어 등에 관한 정보를 자유롭게 교환했습니다. 이 모임은 본래 자유주의 정신을 가진 젊은 층들의 주도로 시작되었지만, 점차 상업주의에 젖어들게 되는데, 그렇게 바뀌어나가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 중의 하나가 역시 모임의 한 일원이었던 빌 게이츠였습니다.

 

빌 게이츠는 회원들에게 보내는 뉴스레터에서 자신과 폴 앨런이 만든 알테어 베이직이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불만을 터뜨리면서 소프트웨어가 무료로 배포되면 개발 동기를 저해한다고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반면 하버드 물리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천재 프로그래머 리처드 스톨만은 1980년대 당대 최고의 프로그래머들이 모여 있던 MIT 인공지능연구소의 동료들이 점점 상업주의에 물들어 가면서 함께 소프트웨어를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 장벽을 치고, 소스가 유료화되는 과정을 지켜보았습니다. 이렇게 배타적이고 비능률적인 개발 환경으로 변모하는 것에 분노한 스톨만은 1983년부터 자유 소프트웨어 운동을 펼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운동은 리누스 토발즈라는 핀란드 출신의 프로그래머가 참여하면서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합니다. 1969년생인 리누스는 헬싱키 대학의 통계학과 교수였던 외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린 시절부터 전자계산기와 컴퓨터를 가지고 놀았습니다. 1981년에 이미 외할아버지가 가지고 온 코모도어 컴퓨터를 갖고 프로그래밍을 했습니다.

리누스 토발즈
리누스 토발즈 (출처: 위키백과)

 

10대의 리누스는 부모님의 이혼과 외할아버지의 죽음과 같은 불행을 겪으면서 더욱 컴퓨터에만 몰두했고, 은둔형 외톨이처럼 수년간 방에 파묻혀서 프로그래밍만 했습니다. 무사가 칼날을 벼리듯이 오랫동안 실력을 갈고닦은 리누스는 1988년 헬싱키 대학 컴퓨터 공학과에 입학하였고, 1991년 유닉스의 교육용 버전인 미닉스를 바탕으로 더 효율적인 새로운 운영체제를 만들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프로그래밍을 하던 그는 1991년 8월 자신의 프로젝트와 소스를 프로그래머 일반에 공개하면서 리처드 스톨만의 자유 소프트웨어 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92년 리눅스 1.02 버전을 내놓으면서 스톨만의 GPL(General Public License, 일반 공공 사용 허가)을 적용하였습니다. 이후 1994년 네트워크 기능이 강화된 새로운 리눅스 버전을 선보였고, 1996년에는 리눅스 2.0 버전을 공개하였습니다. 유닉스를 뛰어넘는, 소스가 공개된 운영체제의 꿈은 점차 현실이 되었던 것입니다.

 

공공이 참여하는 독특한 개발 형태로 만들어진 리눅스가 놀랍게도 성공적인 운영체제라는 것이 알려지자 리처드 스톨만과 리누스 토발즈의 오픈 소스 운동에 대기업들이 속속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1998년에는 웹 브라우저의 개척자 넷스케이프가 이 운동에 참여하였고, 2000년에는 공룡 IT기업 IBM이 자신들의 웹 서버를 리눅스로 바꿨습니다. 1990년대에 등장한 이러한 오픈 소스 운동, 리눅스 운영체제라는 괴물 같은 적에 대해서는 빌 게이츠도 어쩔 도리가 없었으니, 2000년대 이후로도 리눅스의 질주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구글, 오라클, 인텔 등 유수한 IT기업들이 리눅스 개발에 동참했고, 수백만 명의 프로그래머들이 리눅스 개발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전 세계 슈퍼 컴퓨터의 99%가 리눅스를 사용하고 있다고 하며, 두 사람이 쏘아 올린 불꽃으로 인공지능, 클라우드 컴퓨팅, 데이터베이스 등 IT의 많은 분야들이 오픈 소스 형태로 개발되면서 상업주의에 맞서는 한 축으로 IT 기술의 급격한 발전과 평등한 보급에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참고 문헌>

1) 세상을 바꾼 과학기술자들. 주동혁. 2016년. 지성사.

2) 웹사이트 CHM(https://computerhistory.org/)

3) 계산기는 어떻게 인공지능이 되었을까? 한빛미디어. 2019년. 더멋 튜링 저. 김의석 역.

4) 위대한 발명가들. 질리언 클레먼츠. 역자 이선오. 2007년. 미래아이.

5) 무엇이 그들을 디지털 리더로 만들었나. 이정일. 2006년. 컴퓨터생활.

6) 컴퓨터 아키텍처. 우종정. 2014년. 한빛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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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컴 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뉴밀레니엄 시기, IT 벤처 기업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한때 IT 콘텐츠 업체를 창업하여 운영하기도 했다. 최고의 콘텐츠를 찾아보겠다는 일념으로 출판 분야에 뛰어들어 새로운 콘텐츠를 발굴하고 글 쓰는 일을 하고 있다. IT와 출판 분야에서 함께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출판 콘텐츠와 온라인 네트워크의 결합에 대해 깊이 고민 중이다. 저서로 SNS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대안을 제시한 <소셜네트워크, 야만의 광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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