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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라이프니츠 계산기 (출처: 해시넷 http://wiki.hash.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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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가 숫자를 계산하는 계산기에서 출발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컴퓨터 공학을 다른 말로 전자계산학, 전산학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기계로 숫자를 계산하는 발상을 최초로 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자면, 17세기의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 독일의 철학자 라이프니츠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습니다. 파스칼 이전에는 빌헬름 쉬카르트라는 독일 천문학자가 있었는데, 그는 하나의 중심 톱니바퀴와 6개의 부속 톱니바퀴를 이용하여 6자릿수까지 덧셈과 뺄셈을 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들었습니다.
그로부터 수십년이 지난 1642년, 파스칼은 19세의 나이에 기계식 계산기에 대한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고, 쉬카르트보다 더 많은 자릿수를 계산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들었습니다. 라이프니츠는 파스칼의 계산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1674년 덧셈 뺄셈을 넘어 곱셈까지 할 수 있는 계산기를 만들었고요. 그 후 라이프니츠의 계산기를 흉내낸 계산기들이 많이 만들어졌지만 어떤 제품도 라이프니츠의 계산기보다 나은 것이 없었습니다.
19세기에 이르러 1820년 샤를 토마에 의해 설계된 에리스모메터라는 계산기는 라이프니츠 계산기와 상당히 유사했는데 상업적으로 어느 정도 판매가 되었고, 1867년 파리만국박람회에서 대중들의 주목을 받는데 성공했습니다.
사진1: 라이프니츠 계산기 (출처: 해시넷 http://wiki.hash.kr)
라이프니츠의 계산기를 능가하여 매우 복잡한 계산까지 할 수 있는 기계식 계산기에 대한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찰스 배비지입니다. 그리고 그는 기계식 계산기를 넘어서 어떤 계산 명령이든 수행할 수 있는 만능 기계로서의 계산기, 최초로 현대식 컴퓨터의 시초가 될 수 있는 해석 기계에 대한 아이디어를 창안했습니다. 무려 약 200년 전인 1800년대에 그가 낸 아이디어는 많은 컴퓨터 개발자들에게 다채로운 영감을 주었고, 그가 선취한 개념들은 지금도 컴퓨터 공학의 이론적 토대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찰스 배비지는 IT산업과 컴퓨터의 많은 선구자들 중에서도 특별한 위치를 점하고 있으니, IT혁명의 영웅들을 돌아보는 과정에서 배비지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은 빼놓을 수 없는 일입니다.
찰스 배비지는 1791년 12월 26일 영국 런던 남부 지방에서 태어났습니다. 성공한 아버지를 둔 덕에 부유한 가정 환경에서 자랄 수 있었고요. 10살 때 건강이 좋지 않아 시골에서 휴양을 했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기계에 호기심이 많아서 고장 난 기계 인형을 고치기도 했습니다. 수학과 과학을 특히 좋아했고, 집에서는 가정교사에게 라틴어와 희랍어를 배웠습니다.
1810년 아이작 뉴턴이 다녔던 케임브리지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고리타분하고 경직된 학교 수업이 양에 차지 않았던 배비지는 따로 수학책을 사서 독학으로 더 깊이 있는 공부를 했습니다.
배비지는 대학을 다니면서 천왕성을 발견한 천문학자 월리엄 허셜의 아들 존 허셜과 가까워졌고, 여러 친구들과 어울려 수학뿐만 아니라 철학 전반에 관해서도 토론하며 성장해 나갔습니다. 배비지는 탁월한 수학 실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도 교수의 방침을 어기고 학교가 정해주는 범위 이외의 수학 공부를 하면서 눈 밖에 났기 때문에 우등생으로 졸업할 수 없었습니다.
1814년, 봄 캐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하면서 부모의 의사에 반하여 조지아나 휘트모어와 결혼했습니다. 졸업 후에는 직장을 갖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연구를 지속했으며, 1816년과 1819년에 수학 교수직을 얻을 기회가 있었으나 유연하지 못한 성격 때문에 취업에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는 부모의 도움을 받으면서 어렵게 가정을 이끌어나가야 했으나 스스로는 만족스러운 생활을 영위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젊은 시절 배비지는 반항기가 다분하고 자유분방했으며 좋은 쪽으로 보면 매우 자기 철학이 뚜렷한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배비지는 그렇게 힘든 와중에도 친구들을 좋아해서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즐겼고, 여행을 자주 떠났는데 프랑스 파리에서 천문학자 라플라스, 화학자 베르톨레, 수리 물리학자 장 푸리에 등과 같은 역사에 이름이 남은 걸출한 학자들과도 친구가 되었습니다.
사진2: 찰스 배비지 (출처: 위키백과)
1821년 배비지는 자신의 인생을 바꿀 중대한 프로젝트를 맡게 됩니다. 천문학회로부터 친구인 존 허셜과 함께 항해를 위한 별자리 목록표를 새로 만드는 작업 중 수치 계산표에 관한 부분을 맡았습니다. 그 일은 많은 분량의 수치 계산표를 일일이 검산해야 하는 고달프고 지루한 작업이었습니다.
배비지와 허셜은 각기 계산해서 교차 검수를 하는 방식으로 작업을 했는데, 기존의 수치표에서 오류가 너무 많이 나왔기 때문에 신경을 매우 집중해야만 했습니다. 이 일을 하는 과정에서 지친 배비지는 기계가 계산을 한다면 오류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에 강력하게 사로잡혔습니다.
당시 업무상으로 반복해서 숫자를 계산을 하는 사람들을 컴퓨터라고 불렀는데, 그 이름이 현대에서는 계산을 하는 기계인 컴퓨터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 19세기 초반의 배비지는 사람 컴퓨터를 기계 컴퓨터로 바꿀 생각을 한 것입니다. 배비지는 6자릿수를 계산할 수 있는 프로토타입에 해당하는 계산기계를 제작하는데 성공했고, 1822년 천문학회에 공식적으로 계산기계에 대한 아이디어를 공표했습니다. 영국왕립학회는 배비지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에게 1500파운드의 제작비를 지원하기로 약속했습니다.
이때부터 배비지는 계산기계(차분법이라는 계산방식을 썼기 때문에 차분기관(differential engine)이라고 불렸습니다.) 제작에 돌입하게 됩니다. 결과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당시 기술력의 한계 때문에 훌륭한 설계도를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 기계는 완성되지 못합니다.
다만 배비지 탄생 200주년이 되던 1991년에 영국에서 배비지의 설계도에 따라서 계산기계를 만들었고, 작동시켜 본 바에 의하면 현대의 컴퓨터와 똑같은 계산 결과를 낼 정도로 성능이 우수하다고 합니다. 한편, 배비지는 계산기를 만드는데 필요한 공학기술이 없어서 실패를 거듭하자 집에 작업장을 만들고, 전문가들과 함께 나사를 표준화시키고 쇠붙이 절단 기계를 만들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영국의 공작기계산업을 한 단계 도약시키는 업적을 남겼습니다.
사진3: 배비지의 차분기관 (출처: 위키백과)
1830년대 중반에 이르러 배비지는 조금 더 높은 차원의 작동을 할 수 있는 기계를 고안합니다. 사칙연산을 넘어 방정식을 계산할 수 있고, 더 복잡한 명령을 해석하고 계산할 수 있는 기계입니다. 한 번 입력한 문제만 푸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명령을 동시에 입력하여 순차적으로 풀 수 있는 기계였는데 현대 컴퓨터의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밍이 작동하는 방식과 흡사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아이디어는 당시 천에 그림 수를 놓을 수 있는 자카드 베를 직조하는데 사용되던 천공 판자(구멍이 뚫린 판자)에서 가져왔습니다. 판자 대신 작은 카드를 이용해서 구멍을 통과하느냐 못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작업 지시를 내리고 프로세스를 제어하고, 숫자카드로 저장을 하는 등의 방식을 택한 것입니다.
해석기계(analytical engine, 해석기관)라고 부를 수 있는 이 기계는 현대의 컴퓨터가 작동하는 방식과 비슷합니다. 배비지는 이것을 위해서 기계에 다양한 기능을 추가했습니다. 이 기계에는 지시를 실행하고, 제어하고, 데이터를 저장하는 기능까지 포함되어 있는데, 이것은 현대 컴퓨터의 중앙처리장치(CPU)나 주기억장치(RAM, ROM) 등에 대응되는 것입니다.
이 해석기계의 연구와 개발은 이전에 실패한 계산기계의 경험으로 인해 영국왕립학회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했고, 온전히 배비지 자신의 노력과 투자로만 지속되어야 했습니다. 물론 이 역시 당시의 기술로는 불가능한 것이었기에 배비지는 살아 생전 이 기계를 완성하지 못했습니다. 배비지의 조카뻘이었던 동료 에이다 러브레이스는 이 해석기계에 대해서 ‘마치 자카드 방적 베틀이 꽃과 잎사귀들을 수놓듯이 대수식을 직조한다.’라고 회고했습니다.
사진4: 허만 홀러리스의 기계 (출처: 게티이미지 코리아)
배비지는 1871년,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인간 컴퓨터를 대체할 수 있는 기계 컴퓨터, 해석기계를 만들기 위한 연구를 지속했습니다. 비록 배비지는 자신의 일생일대의 목표는 실패했지만, 앞서 말했던 공작기계산업 등 많은 부분에서 기여를 했습니다. 1832년에 <제조와 경제학에 대해>라는 책을 써서 분업화와 혁신을 이끌었고, 후대의 존 스튜어트 밀이나 마르크스와 같은 정치경제학자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1900년대 초반, 배비지의 연구를 토대로 만들어진 허만 홀러리스의 천공 카드형 도표 제작 기계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리고 1924년 허만 홀러리스의 회사는 인터내셔널 타임 리코딩 컴퍼니 등과 합병하여 CTR이라는 회사를 설립하였는데, 1924년 IBM이라는 이름으로 사명을 변경하였습니다.
IBM은 잘 알다시피 군사용 컴퓨터, 기업용 대형 컴퓨터에서 안방을 장악한 마이크로 컴퓨터, PC에 이르기까지 컴퓨터 제작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기업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누리고 있는 정보통신기술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선구적이고, 때로는 외골수 같은 고집스러운 학자들의 거듭되는 실패와 그로 인해 흘린 절망적인 땀과 눈물을 바탕으로 하나씩 완성되어간 것이라는 것을 찰스 배비지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1) 컴퓨터의 아버지 배비지. 바다출판사. 2006년.
2) 톱니바퀴 컴퓨터. 지식함지 2016년.
3) 세상을 바꾼 천재들의 100가지 아이디어. 라임. 201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