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검증된 모델을 가져왔고, 모두가 자기 자리에서 합리적으로 판단했다. 그런데 결과는 실패였다. 우리는 논리로 결정하지만, 그 끝에서 제품을 쓰는 사람은 감정으로 반응하기 때문이다. 이 글은 그 ‘범인 없는 실패’가 어디서 조립되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나는 십수 년간 콘텐츠를 만들어 왔고, 그동안 여러 프로젝트가 무너지는 걸 가까이서 보며 ‘왜 다들 열심히 했는데도 이런 실패가 생기는가’를 오래 고민했다. 이 글은 그 고민의 첫 기록이자, 개발 조직에서 어긋남이 어떤 모양새로 생겨나는지에 대한 고찰이다. 특정 회사나 제품을 짚는 대신 ‘유형’으로만 다루는 건, 어디서나 되풀이되는 패턴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한 번쯤 본 적 있는 장면일 것이다. 해외에서 크게 성공한 어떤 서비스가 있다. 만든 회사도 크고, 지표도 화려하다. 누군가 그걸 가져와 말한다. “이거, 저쪽에서 이만큼 됐대. 우리도 잘하는 걸 좀 얹어서 만들면 되지 않겠어?”
반대할 이유가 마땅치 않다. 검증된 레퍼런스가 있고, 우리에게는 그 위에 얹을 만한 강점이 있다. 다만 이때 가져오는 건 대개 그 서비스가 성공한‘결과’이지, 그것을 성공시킨‘인과’가 아니다. 무엇이 사람을 붙들었는지는 잘 보이지 않고, 눈에 띄는 건 화면과 기능과 숫자 같은 겉모습뿐이다. 그런데도 회의실의 공기는 합리적이다. 그렇게 프로젝트가 시작되고, 시간이 지나고, 결과가 나온다. 안 된다. 숫자는 오르지 않고, 공들여 붙인 기능은 아무도 쓰지 않는다.
흔히 여기서 범인을 찾기 시작한다. 윗선이 트렌드만 좇았다거나, 기획이 안일했다거나, 시장을 잘못 읽었다거나. 그런데 나는 이 ‘범인 찾기’ 자체가 대개 헛다리라고 생각한다. 더 불편한 쪽은 따로 있다. 다들 제 자리에서는 옳게 판단했는데도 결과가 무너지는 경우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 한 장면을 펼쳐 보는 데서 시작하자.
AI로 콘텐츠를 만들어 온 어느 조직이, 성장을 위해 숏폼과 공개 피드 기능을 새로 얹기로 했다고 하자. 결정은 대략 이렇게 내려진다.
경영을 책임지는 사람은 성장을 만들어 내야 한다. 마침 숏폼은 지금 가장 검증된 채널이고, 모두가 그쪽으로 가고 있다. “검증된 흐름을 탄다”는 건 그 자리에서 가장 방어 가능한 판단이다. 그 아래에서 실무를 끄는 사람은 “그럼 우리가 가장 잘하는 걸 얹자”고 답한다. 모르는 길을 새로 파기보다, 우리가 이미 잘하는 AI 콘텐츠를 숏폼에 결합하는 편이 안전하고 자연스럽다. 그리고 만드는 사람은 그 방향을 받아, 필요한 기술과 레퍼런스를 찾아 가장 합리적인 구현 경로를 짠다. 저마다 자기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가장 그럴듯한 판단을 한 것이다. 그런데 합쳐 놓으니 결과는 실패였다.

무엇이 빠졌을까? 회의실에서 오간 건 성장률과 체류시간, 트래픽 같은 숫자였다. 모든 판단은 그 숫자 위에서 논리적으로 내려졌다. 그런데 그 숫자 어디에도 잡히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이 사용자가 이 서비스를 어떤 마음으로 쓰는가’다. AI로 대화하고 콘텐츠를 만드는 사람들 상당수는, 자기만의 작은 세계에서 사적으로 그것을 즐긴다.
실제로 제타나 크랙 같은 국내 AI 캐릭터 채팅 서비스는 ‘비공개 캐릭터’와 ‘나만의 공간’을 핵심 기능이자 홍보 문구로 내세운다. 자신이 만든 것을 남에게 전시하기보다, 혼자 혹은 좁은 울타리 안에서 즐기려는 수요가 그만큼 크다는 뜻이다. 그런 사용자에게 ‘공개하고 퍼뜨리는’ 숏폼·피드의 속성은, 성장의 도구이기 전에 그들이 가장 원치 않던 방향이다.
게다가 숏폼의 바이럴은 무작위성이 크고 빠른 실험과 즉흥적 대응을 먹고 자라는데, 결재 단계가 여럿인 조직은 그 타이밍을 좀처럼 맞추지 못한다. 조직 차원에서 숏폼으로 성과를 낸 사례들을 들여다보면, 출시 한참 전부터 다져 온 커뮤니티와 계획된 사전 바이럴, 마케팅 조직의 끈질긴 풀뿌리 활동이 그 아래 깔려 있는 경우가 많다. 개인이 올린 영상 하나가 우연히 터지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다. 그런데 이런 사전 작업은 개발 일정표에 항목으로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돌아온 비용은 이렇다. 공들여 붙인 기능은 켜져 있는데 아무도 그 길로 들어오지 않고, 정작 기존의 핵심 사용자는 “내 공간이 전시장이 되는 것 같다”며 거리를 둔다. 새 사용자도 얻지 못하고, 본래 우리를 지탱하던 정서마저 건드리는 양쪽을 함께 잃는 자리에 도달한다. 카카오톡 역시 체류시간을 늘리려 공개 피드와 숏폼을 전면에 얹었다가, 사용자들의 거센 저항을 받고 되돌린 일이 있었다. 규모만 다를 뿐, 어긋남이 조립되는 방식은 놀랄 만큼 닮았다.

그러니 흔히 하듯 여기서 범인을 찾는 건 대개 헛다리다. 각자의 자리에서 나온 합리가 같은 방향으로 정렬되지 못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어긋남은 숫자가 아니라, 사용자의 마음이 있는 자리에서 벌어진다.
실패는 비합리의 산물이 아니다. 각자의 합리성이 같은 방향으로 정렬되지 못한 결과다.
그렇다면 의문이 남는다. 그렇게 똑똑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왜 아무도 중간에 멈추지 못할까. 분명히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유는 역설적이다. 모두가 너무 열심히, 너무 ‘제대로’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제품을 만들어 빠르게 측정하고, 지표를 보고, 성공 사례를 벤치마킹한다. 회의에서는 그럴듯한 숫자가 담긴 장표가 돌아다닌다. 이 모든 절차는 “우리는 데이터에 기반해 합리적으로 일하고 있다”는 감각을 채워준다. 문제는 그 감각이 진짜 비어 있는 것을 가려버린다는 데 있다. 재기 쉬운 숫자를 목표인 양 떠받들거나, 보기에는 좋지만 어떤 결정으로도 이어지지 않는 숫자를 들여다보는 오래된 함정에 계속 빠지는 이유도 같다. 무언가를 부지런히 측정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알리바이가 되기 때문이다.
이 알리바이는 지표에만 깃들지 않는다. 기능을 더하는 일에도 똑같이 깃든다. 예를 들어, 어떤 캐주얼 게임을 만든다고 해 보자. 이미 성공 사례가 수두룩한 장르이니, ‘핵심 재미야 당연히 보장되겠지.’라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거기에 저마다 ‘이건 있어야 하지 않나’ 싶은 시스템을 하나씩 얹는다. 랭킹을 넣고, 출석 보상을 만들고, 매일 도는 던전을 추가하고, 커뮤니티 기능도 이것저것 붙인다. 하나하나는 다 그럴듯하고, 더할 때마다 ‘진척’이라는 감각이 쌓인다. 계획표의 항목은 차곡차곡 지워지고, 내부적으로는 무언가 완성되어 가는 듯하다.

그런데 막상 출시하면, 정작 손대지 않은 ‘핵심 재미’가 밋밋했다는 사실이 그제야 드러난다. 사용자는 기대만큼 오지 않는다. 반면 급하게 붙여 둔 그 많은 기능은, 출시 이후 전부 유지보수해야 할 짐으로 남는다. 지금 인력으로는 감당이 안 되고, 지친 사람들이 하나둘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남은 이들은 더 무거워진 업무와 지표 압박 속에서, 역설적이게도 ‘콘텐츠를 더 넣어 반등시키자’는 결정으로 떠밀린다. 그러면 유지보수 비용은 또 늘고, 어딘가에서 사고가 터지고, 겨우 수습하고 나면 어느새 다시 제자리다. 빠져나오려 발버둥 칠수록 더 깊이 가라앉는 늪이다.
이 모든 건 ‘성공한 장르니까 핵심 재미야 당연히 되겠지’라는 믿음에서 비롯됐다.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사실은 가장 중요한 것을 들여다보지 않으려고 논리로 덮어 둔 감정의 공백에 가깝다. 정작 우리가 참고한 그 성공작들이 사용자에게 어떤 ‘감성’으로 가닿았는지는 끝내 따져 보지 않은 것이다. 누군가는 한눈에 사로잡는 고유한 아트워크로, 누군가는 사용자와 함께 쌓아 온 입소문과 방송 같은 바깥의 이야기로, 또 누군가는 군더더기 없이 빽빽하게 짜인 플레이의 밀도로 사람의 마음을 붙들었다. 그 ‘무엇이 사람을 붙들었나’를 건너뛴 채, 겉으로 드러난 기능 목록만 베껴 온 셈이다.
모든 조직이 그렇다는 건 아니다. 현장은 저마다 다르다. 다만 손쉬운 숫자를 목표로 떠받드는 일이든, 보기 좋은 숫자를 들여다보는 일이든, 끝없이 불어나는 기능이든, 절차가 만들어 주는 알리바이든, 결국 같은 곳을 가리킨다. 우리가 ‘제대로 일하고 있다’고 느끼게 해 주는 바로 그 장치들이, 정작 비어 있는 핵심 가정을 가려 버린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늘 경계해야 한다. 절차가 통찰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여기까지 오면 답이 뻔해 보인다. 절차에 매몰되지 말고, 핵심 가정부터 제대로 세우면 된다. 사용자가 진짜 무엇을 원하는지 정의하고, 그걸 빠르게 검증하면 된다. “작게 만들어 시장에 던져 보고, 반응을 측정해 배운 걸로 다음을 고쳐 나가라.” 요즘의 수많은 제품 방법론이 입을 모아 그렇게 가르친다.
게다가 지금은 그 ‘빨리 만들기’가 거의 공짜가 된 시대다. 시제품을 뽑는 비용이 바닥까지 내려왔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시제품 수십 개를 만들어 동시에 던져 볼 수 있다. 그러니 반론도 정당하다. 처음 세운 가정이 좀 허접하면 어떤가. 일단 던지고, 반응을 보고, 아닌 걸 쳐내면서 진짜를 깎아 나가면 되지 않나. 가정을 완성해 두고 시작하는 게 아니라, 검증으로 골라내는 거니까.
맞다. 그런데 여기에 잘 이야기되지 않는 맹점이 있다.
쳐내는 데에도 기준이 필요하다. 시제품 수십 개를 돌리면 지표 수십 개가 나온다. 그런데 어떤 숫자가 진짜 신호이고 어떤 게 노이즈인지, 이 반응이 사용자가 정말 원해서인지 그냥 새로워서인지, 측정이 어디서 왜곡된 건 아닌지, 누군가는 매번 판단해야 한다. 그 판단의 잣대는 시제품 더미 안에 들어 있지 않다. 무엇을 신호로 볼지에 대한 눈이 먼저 서 있어야, 비로소 쳐내기가 시작된다. 그 눈이 없으면 수십 개의 결과는 그냥 수십 개의 숫자일 뿐이다. 도구가 싸지고 시제품이 많아질수록, 정작 희소해지는 건 이 눈이다.
그러니 ‘빨리 만들어 쳐낸다’는 것도, 알고 보면 앞서 말한 절차의 또 다른 얼굴이다. 측정하고 벤치마킹하던 자리에 ‘빠른 빌드’가 들어섰을 뿐이다. 우리는 ‘이만큼 많이 만들어 던져 봤다’는 자기 위로 속에서, 어느새 통찰까지 갖춘 듯 행동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시제품을 백 개 던져도, 무엇을 보고 무엇을 버릴지 모른다면 백 개의 숫자가 쌓일 뿐이다. AI는 그 숫자를 정리해 주지만, 그중 무엇이 핵심인지까지 결정해 주지는 않는다. 결국 빠른 빌드는 빈 가정을 더 빨리, 더 많이 찍어내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 자리는 무엇으로 채우는가. 더 정교한 방법론은 답이 아니다. 방법론이 못 채우는 자리를 또 다른 방법론으로 채우려는 건 같은 실수의 반복이다. 측정도, 빠른 빌드도, 잘 쓰인 문서도 닿지 못하는 그 자리는 결국 사용자 경험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사용자란 꼭 앱을 내려받는 개인 소비자만은 아니다. 우리 소프트웨어를 실제로 쓰게 될 다른 팀이든, 계약을 맺은 기업의 담당자든, ‘우리가 만든 것을 끝에서 직접 겪는 사람’은 모두 여기 들어간다. 무엇을 신호로 볼지 가리는 눈도, 결국 그 사람을 직접 겪어 본 데서만 자란다.
우리가 무엇을 만들든, 그 끝에서 그것을 실제로 쓰는 건 결국 사람이다. 그리고 사람은 자기가 겪은 경험의 결과를 우리에게 말해 준다. 예를 들어, “광고가 너무 많다”라는 또렷한 피드백을 곧이곧대로 “광고를 빼 달라”로 받으면 길이 막힌다. 그 말을 만드는 쪽의 언어로 옮겨 보면 대개 “광고 자체가 싫다”기보다 “광고가 내 경험을 끊는 게 싫다”에 더 가깝다. 그렇게 한 번 번역하고 나면, 손대야 할 곳이 ‘광고를 없앤다’에서 ‘경험의 흐름을 어떻게 지킬까’로 통째로 옮겨 간다.

이때 답은 기획서 위에서 계산되지 않는다. 어떻게 손대야 사용자가 흐름이 끊겼다고 느끼지 않으면서도 우리 쪽 손익이 무너지지 않는지, 그 둘이 가장 덜 부딪치는 지점은 직접 그 서비스를 써 보며 몸으로 겪어야 비로소 가늠된다. 단순한 지표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지표는 대개 가까운 시일의 인과만 비춰 주기 때문이다.
어떤 변화를 줬을 때 다음 주 숫자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보여 줘도, 그 변화가 반년 뒤 사용자의 잔존과 애착으로 어떻게 이어지는지까지는 좀처럼 말해 주지 않는다. 결국 사용자가 말하는 것과 만드는 쪽이 실제로 풀어야 하는 것 사이의 간극은 명세서로 메워지지 않는다. 무엇이 사람의 마음을 건드리고 무엇이 거스르는지를 논리로 역산하는 게 아니라 먼저 느끼는 것. 감성은 논리의 반대편이 아니라, 논리가 딛고 설 바닥인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 흔히 우리는 자기 자리에서 ‘무엇을 더 잘할까’를 묻는다. 그러나 정작 어긋남을 막는 건, ‘내 자리에서는 무엇이 안 보이는가’를 점검하는 일이다. 앞의 세 사람을 다시 떠올려 보자. 숫자를 들고 결정하는 사람은 그 숫자 이면에 어떤 마음이 깔려 있는지를 굳이 들여다보려 애써야 하고, 우리가 잘하는 걸 얹자던 사람은 그 강점을 다른 것과 붙였을 때 어떤 리스크가 따라오는지를 먼저 점검해야 한다.
구현을 맡은 사람은 자신이 만들 것뿐 아니라 ‘내가 만들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짚어야 한다. 이를테면 일정을 산출할 때, 기능을 짜는 데 며칠이 드는지만이 아니라, 그 기능이 사용자에게 어떤 경험을 주는지를 가늠하는 일까지 그 안에 들어와야 한다. 각자가 자기 시야의 사각을 솔직히 내놓을 때, 한 사람은 끝내 볼 수 없던 그림이 비로소 겹쳐 보인다.
제대로 된 분석은 논리와 감성을 따로 떼어 두는 게 아니라, 같은 선 위에 올려놓고 인과를 함께 보는 일이다. 표면의 지표 뒤에 어떤 마음과 굴곡이 숨어 있는지, 그건 화려한 숫자와 그래프가 대신 보여 주지 않는다. 그리고 이 재정리는 결코 추상적인 다짐에 그치지 않는다. 논리와 감성을 같은 선에 놓고 보기 시작하면, 회의 테이블에서 무엇을 신호로 받아들이고, 무엇을 흘려보낼지가 달라진다. 끝내 어떤 결정을 내리는지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놓쳤다면, 어쩌면 지금 다음과 같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이 중 하나라도 짚이는 데가 있다면, 더 정교한 지표나 더 빠른 빌드가 필요한 게 아니다. 각자의 사각을 사용자의 자리에서 한 번 맞춰 보고, 논리와 감성 사이의 인과가 어디서 끊어졌는지를 점검해야 한다는 신호다.
이 글에서 적은 건 어디까지나 내가 지나온 자리에서 비친 풍경일 뿐이다. 나와 다른 길을 걸어 이미 더 나은 답을 찾은 조직도 분명 많을 것이고, 어쩌면 이 글의 어떤 대목은 누군가에게는 한참 전에 지나온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 편에 모든 걸 담기보다는 그동안 부딪히며 겪은 것들을 기회가 닿을 때마다 조금씩 풀어 보려고 한다. 이 글에 대한 비판도, 정반대의 반론도 당연히 있을 거다. 또 그런 목소리가 있어야 이 이야기도 비로소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저마다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무게를 견디며 프로덕트를 만들어 가는 모든 분들을 응원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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