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썼습니다, 그래서 뭘 더 잘했나요

요즘 주니어 디자이너들이 모인 커뮤니티나 오픈채팅방을 보다 보면 비슷한 질문을 자주 보게 됩니다.포트폴리오에 ‘AI 활용 경험’을 넣고 싶은데, 어떤 AI 도구를 공부해야 하느냐는 질문입니다. 누군가는 Claude를 배워야 하는지 묻고, 누군가는 Figma Make나 Cursor를 써본 경험을 넣어도 되는지 고민합니다. 채용 공고에 AI 활용 역량이 적혀 있으니, 포트폴리오 한쪽에 사용 가능한 AI 도구 목록을 정리해두는 게 좋겠냐고 묻는 경우도 있습니다. 질문 자체는 충분히 이해됩니다. 시장은 빠르게 바뀌고 있고, 주변에서는 모두 AI를 쓴다고 말하고 있으며, 나만 뒤처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은 사람을 꽤 부지런하게 만듭니다. 문제는 그 부지런함이 가끔 이상한 방향으로 달려간다는 데 있습니다.
특히 주니어 디자이너에게 AI는 애매한 존재입니다. 안 쓰자니 시대에 뒤처지는 것 같고, 쓴다고 말하자니 무엇을 어떻게 보여줘야 할지 막막합니다. 예전에는 포트폴리오에서 리서치, 문제 정의, 와이어프레임, UI 시안, 프로토타입, 회고 정도를 보여주면 어느 정도 기본 골격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사이사이에 AI가 끼어듭니다. 인터뷰 내용을 요약해주고, 페르소나 초안을 만들어주고, 랜딩 페이지 시안을 여러 개 뽑아주고, 프로토타입 코드까지 만들어줍니다.
그러다 보니 주니어 디자이너 입장에서는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나도 “포트폴리오에 AI를 썼다는 걸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여기까지는 맞습니다. 다만 그다음 질문이 ‘어떤 도구를 배워야 할까’로 바로 넘어가는 순간, 문제의 초점이 흐려집니다.
AI 활용 경험은 특정 도구를 써봤다는 인증서가 아닙니다. Claude를 써봤고, ChatGPT를 써봤고, Figma Make를 눌러봤고, Cursor로 간단한 화면을 만들어봤다는 사실만으로는 포트폴리오에서 큰 힘을 갖기 어렵습니다. 도구를 직접 써본 경험이 무의미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채용자가 궁금해하는 것은 도구의 이름이 아닙니다. 더 정확히는 그 도구를 통해 디자이너가 자신의 작업 방식을 어떻게 만들었는가입니다.
마치 요리를 해본 경험을 말해야 하는 자리에서, 칼 브랜드와 프라이팬 모델명만 줄줄 외우고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중요한 건 어떤 도구를 들었느냐가 아니라, 그 도구로 어떤 재료를 어떻게 손질했고, 결과적으로 음식의 맛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AI 시대의 포트폴리오에서 주니어 디자이너가 보여줘야 할 것은 단순한 도구 숙련도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작업 과정 안에서 AI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설명하는 능력입니다. 다시 말해 AI를 썼다는 사실보다, AI를 어디에 배치했는지가 중요합니다. 리서치 정리에 썼는지, 시안 탐색에 썼는지, 콘텐츠 구조를 비교하는 데 썼는지, 사용성 테스트 시나리오를 만드는 데 썼는지에 따라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리고 그 각각의 활용 방식은 디자이너가 어떤 문제를 중요하게 봤는지, 어떤 업무를 반복적이라고 판단했는지, 어떤 부분은 사람의 판단으로 남겨두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좋은 AI 활용 경험은 대체로 이런 구조를 가집니다. 먼저 기존 작업 과정에 병목이 있었습니다. 비슷한 레이아웃 시안을 여러 번 반복해서 만들거나, 긴 인터뷰 원문에서 반복되는 불편 표현을 정리하거나, 랜딩 페이지의 카피와 정보 구조를 여러 방향으로 비교해야 하는 상황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그다음 디자이너는 이 병목 중 일부를 AI로 압축했습니다.
반복되는 시안 생성, 초안 정리, 텍스트 분류, 코드 프로토타입 제작처럼 시간이 많이 들지만 반드시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붙잡고 있을 필요는 없는 일을 AI에게 맡긴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끝나면 안 됩니다. 그렇게 확보한 시간과 사고력을 디자이너가 어디에 다시 투자했는지를 보여줘야 합니다. 사용자 문제를 더 깊게 분석했는지, 시안 간 차이를 기준에 따라 비교했는지, 문제 정의를 더 날카롭게 좁혔는지까지 이어져야 합니다.
예를 들어, 포트폴리오에 ‘Figma Make를 활용해 여러 개의 랜딩 페이지 시안을 제작했습니다’라고 적는다면, 이 문장은 아직 약합니다. AI가 시안을 만들어준 것인지, 디자이너가 그 시안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어떤 기준으로 선택했는지 알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반면 ‘초기 랜딩 페이지의 핵심 가치를 사용자가 빠르게 이해하지 못한다는 문제를 발견했고, Figma Make를 활용해 정보 배치와 메시지 우선순위가 다른 시안 5개를 빠르게 생성했습니다. 이후 각 시안을 가치 제안, CTA 인지 가능성, 신뢰 요소 노출 방식 기준으로 비교했고, 최종적으로 사용자가 3초 안에 서비스의 목적을 이해할 수 있는 구조로 재정리했습니다’라고 쓰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이 문장에서는 AI가 주인공이 아닙니다. 주인공은 여전히 디자이너입니다.

주니어 디자이너가 포트폴리오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지점은 AI가 만든 결과물을 자신의 역량처럼 전면에 내세우는 것입니다. 생성형 AI는 생각보다 빠르게 그럴듯한 결과물을 만들어냅니다. 문제는 그 그럴듯함이 디자이너의 판단을 가릴 수 있다는 점입니다. 화면은 멋져 보이는데 왜 이 구조여야 하는지 설명하지 못하거나, 카피는 매끄러운데 어떤 사용자 문제를 해결하는지 불분명하거나, 프로토타입은 움직이는 데 실제 사용 흐름에서는 중요한 예외 상태가 빠져 있다면, 그 결과물은 포트폴리오에서 오히려 불안한 신호가 될 수 있습니다. 채용자는 완성된 화면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화면이 어떤 사고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는지 봅니다.
AI를 활용한 포트폴리오도 같은 기준으로 봐야 합니다. 좋은 사례는 AI가 무엇을 만들어줬는지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AI가 만든 초안을 어떻게 의심했고, 어떤 기준으로 걸러냈고, 어디를 다시 고쳤는지를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AI가 인터뷰 내용을 요약해 줬다면, 그 요약을 그대로 인사이트로 옮기는 것은 위험합니다. 사용자의 말은 언제나 맥락 안에서 해석되어야 하고, 많이 언급된 불편이 반드시 가장 중요한 문제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그래서 좋은 포트폴리오라면 ‘AI로 인터뷰를 요약했습니다’에서 멈추지 않고, ‘AI가 1차로 분류한 불편 표현을 실제 행동 흐름과 다시 대조했고, 빈도는 낮지만 이탈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항목을 따로 분리했습니다’까지 가야 합니다. 이때 AI는 정리 도구이고, 디자이너의 역할은 해석과 판단입니다.
시안 작업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복되는 UI 변형을 AI로 만드는 것은 충분히 좋은 활용입니다. 다만 포트폴리오에 들어가야 할 핵심은 ‘AI로 10개의 시안을 만들었습니다’가 아닙니다. 10개의 시안 중 어떤 기준으로 3개를 추렸고, 최종안에서 어떤 사용자 경험을 강화했는지가 핵심입니다. 사용자가 처음 들어왔을 때 무엇을 먼저 이해해야 하는지, 어떤 정보가 신뢰를 만드는지, CTA는 언제 등장해야 자연스러운지, 모바일 환경에서는 어떤 요소가 과도한지 같은 판단이 있어야 합니다. AI는 선택지를 넓혀줄 수 있지만, 선택의 이유까지 대신 책임져주지는 않습니다.

AI 활용 역량을 조금 더 실무적으로 말하면, 업무를 나누는 능력에 가깝습니다. 무엇을 AI에게 맡길 수 있고, 무엇을 사람이 끝까지 붙잡아야 하는지 구분하는 능력입니다. 이 구분이 없으면 AI는 편리한 보조 도구가 아니라, 작업 과정을 흐리는 안개가 됩니다. 주니어 디자이너가 모든 것을 AI에게 맡기면 빠르게 결과물은 나올 수 있지만, 그 결과물을 설명하는 힘은 약해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모든 것을 직접 하겠다고 하면 속도와 탐색 범위에서 손해를 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둘 사이의 적절한 분업입니다.
AI가 상대적으로 잘하는 일은 반복, 요약, 변형, 초안 생성, 패턴 탐색입니다. 긴 VOC를 1차 분류하거나, 같은 메시지를 여러 톤으로 바꾸거나, 특정 레이아웃을 다른 정보 구조로 변형하거나, 간단한 프로토타입 코드를 빠르게 만들어보는 일은 AI가 잘 도와줄 수 있습니다. 반면 디자이너가 책임져야 하는 일은 문제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사용자의 맥락을 해석하고, 비즈니스 목표와 사용자 목표 사이의 균형을 잡고, 최종안을 선택하는 기준을 세우는 일입니다. 이 영역은 단순 생성으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생성된 결과물이 많아질수록 더 중요해집니다. 선택지가 늘어나면 판단의 부담도 같이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포트폴리오에서는 이 분업 구조를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 좋습니다. 프로젝트 과정 안에 ‘AI 활용’이라는 별도 페이지를 억지로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리서치, 문제 정의, 아이데이션, UI 탐색, 프로토타입, 검증 과정 안에서 AI가 어디에 들어갔는지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편이 더 좋습니다. 리서치 단계에서는 인터뷰 원문 정리와 패턴 추출에 AI를 썼지만 최종 인사이트는 행동 근거와 대조해 재정의했다는 식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UI 단계에서는 반복되는 시안 변형을 AI로 만들었지만, 최종 선택은 정보 위계, 접근성, 컴포넌트 재사용성 기준으로 결정했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AI 도구는 앞으로도 계속 바뀔 것입니다. 지금 많이 언급되는 도구가 몇 달 뒤에도 같은 위치에 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새로운 모델이 나오고, 기존 도구에 AI 기능이 붙고, 디자인 도구와 개발 도구의 경계는 더 흐려질 것입니다. 그러니 포트폴리오를 특정 도구 이름 중심으로 구성하는 것은 생각보다 위험합니다. 물론 현재 사용한 도구를 숨길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도구 이름이 제목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Claude를 활용한 UX 리서치’보다 ‘인터뷰 데이터에서 문제 가설을 좁히는 과정’이 더 오래갑니다. ‘Figma Make로 만든 랜딩 페이지’보다 ‘첫 화면의 가치 전달력을 높이기 위한 시안 비교 과정’이 더 강합니다. 도구는 시간이 지나면 바뀌지만, 문제를 정의하고 판단하는 방식은 쉽게 낡지 않습니다.
주니어 디자이너가 AI 활용 경험을 포트폴리오에 넣고 싶다면, 먼저 자신이 한 프로젝트를 다시 훑어봐야 합니다. 이 프로젝트에서 반복 작업은 어디에 있었는지, 사람이 오래 붙잡고 있었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었던 일은 무엇이었는지, 반대로 절대 AI에게 맡기면 안 되는 판단은 무엇이었는지 구분해 봐야 합니다. 그리고 AI를 통해 줄인 시간이 실제로 더 나은 UX 판단으로 이어졌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단순히 시간을 아꼈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시간을 사용자 문제를 더 깊게 파악하는 데 썼는지, 대안을 더 많이 비교하는 데 썼는지, 실제 사용 흐름의 예외 상태를 점검하는 데 썼는지까지 보여줘야 합니다.
반대로 ‘ChatGPT로 페르소나를 만들고, Claude로 문제 정의를 하고, Figma Make로 UI를 만들었습니다’처럼 쓰면 겉보기에는 AI를 많이 쓴 것 같지만, 실제로는 디자이너가 무엇을 판단했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이건 마치 팀 프로젝트 발표에서 ‘저희는 회의도 했고, 노션도 썼고, 피그마도 썼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중요한 건 회의를 했다는 사실이 아니라 회의에서 어떤 결정을 했느냐입니다. 노션을 썼다는 사실이 아니라 어떤 정보를 어떻게 정리했느냐입니다. AI도 똑같습니다. 도구 이름은 맥락을 보조할 뿐, 역량을 대신 증명하지 않습니다.

AI 시대의 주니어 포트폴리오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결과물의 의미가 조금 달라졌다는 점입니다. 결과 화면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시각적으로 완성도가 낮거나 기본적인 UI 품질이 부족하면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제 결과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생성형 AI가 어느 정도 그럴듯한 화면을 빠르게 만들어주는 시대에는 화면 뒤에 있는 판단의 흔적이 더 중요해집니다. 왜 이 문제를 골랐는지, 왜 이 사용자를 우선으로 봤는지, 왜 이 흐름을 선택했는지, 왜 다른 대안은 버렸는지, 왜 AI에게 이 작업을 맡겼고 왜 이 부분은 직접 판단했는지를 보여줘야 합니다.
그래서 주니어 디자이너가 포트폴리오에 AI 활용 경험을 넣을 때는 질문을 바꿔야 합니다. ‘어떤 AI 도구를 공부해야 할까요?’가 아니라, ‘내 디자인 과정에서 AI가 들어가면 가장 효과적인 지점은 어디였을까요?’라고 물어야 합니다. ‘이 도구를 써봤다고 적어도 될까요?’가 아니라, ‘이 도구를 통해 내 판단이 더 좋아졌다는 근거를 보여줄 수 있을까요?’라고 물어야 합니다. 질문이 바뀌면 포트폴리오의 내용도 바뀝니다. 도구 소개가 아니라 작업 과정이 보이고, 기능 나열이 아니라 문제 해결의 흐름이 보입니다.
AI FOMO는 당분간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새로운 도구는 계속 나오고, 누군가는 매일 더 빠르게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 속에서 불안해지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포트폴리오는 유행하는 도구의 출석부가 아닙니다. 포트폴리오는 내가 어떤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며, 어떤 방식으로 결과를 개선하는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문서입니다.
AI는 그 과정을 더 빠르게 만들 수 있고, 더 넓게 탐색하게 해줄 수 있으며, 반복되는 일을 줄여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포트폴리오에서 평가받는 것은 AI가 아니라 디자이너입니다. 좋은 포트폴리오는 ‘저는 이 도구를 쓸 줄 압니다’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저는 이 도구를 이렇게 써서, 더 중요한 판단에 집중했습니다’까지 보여줄 때 비로소 진짜 설득력이 생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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