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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

소버린 AI와 자체 생태계를 가진 IT 강대국, 러시아를 가다

구술사
8분
5시간 전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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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4월은 계절의 경계가 무색할 만큼 가혹합니다. 저는 작년 이맘때쯤 모든 것이 막혀 있는 이곳 러시아에 주재원으로 처음 넘어왔습니다. 올해의 4월 역시, 눈이 오기도 비가 오기도 하며 많은 사람이 아직 두꺼운 패딩을 입고 다닙니다. 그런 나라에서 개발자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경험한 다양한 것들을 공유하고자 펜을 들었습니다.

 

모스크바의 4월 <출처: 작가 촬영>

 

러시아에서는 인터넷이 잘 안되거나, 메신저가 막히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구글의 검색창, 유튜브의 알고리즘, 인스타그램의 피드는 이곳에서 접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빈자리에 들어선 것은 기술의 퇴보가 아닙니다. 오히려 외부의 간섭 없이 스스로 진화하기 시작한 기묘하고도 강력한 자생적 생태계가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러시아 정부의 강력한 지원과 열정이 넘치는 개발자들의 손에서 다양한 IT시스템과 AI 서비스들이 만들어졌습니다. 국제 표준을 따르지는 않지만, 독립국가연합(CIS) 시장을 기반으로 자체 IT 생태계를 추구하며, 결제나 피지컬 AI 부문에서도 강력한 서비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AI 서비스 분야에서는 얀덱스GPT(YandexGPT), 기가챗(Gigachat) 등 서비스가 활발하게 쓰이고 있으며, 다양한 AI 결합 서비스들도 마찬가지로 나오고 있습니다. 이 모든 변화는 글로벌 외산 AI 시스템 없이 독자적인 개발로 이루어져, 앞으로 이어질 AI 패권 전쟁에서도 러시아는 강력한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또한 글로벌 서비스 대비 뛰어난 서비스를 가진 영역도 많지만, 열약한 부분도 분명히 있습니다. 러시아의 사례를 발판으로 삼아 한국 또한 독자 개발을 통해 더 강력한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방향으로 갈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커졌습니다. 오늘은 그런 이야기를 전해보려고 합니다.

 

1. 구글 없는 모스크바의 아침과 러시아의 IT 생태계

러시아가 실리콘밸리 표준을 버리고 독자 노선을 걷게 된 배경에는 생존을 향한 처절한 의지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주요 BigTech 기업 <출처: 작가>

 

러시아가 글로벌 표준 대신 독자 노선을 택한 이유

시작은 서방의 경제 제재였습니다. 그로 인해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하루아침에 서비스를 중단했을 때, 러시아 사회가 직면한 것은 단순한 불편함이 아닌 국가 시스템 전체가 마비될 가능성이었습니다. 러시아는 이 거대한 위기를 기회로 보고 국가 IT 기업에 투자했습니다. 외부 기술에 종속되는 것이 곧 데이터 주권과 국가 안보를 타인에게 양도하는 것임을 뼈저리게 실감한 이들은 자국만의 기술 요새를 쌓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모스크바에서 ‘글로벌 표준’은 더 이상 선망의 대상이 아닌 언제든 무기로 돌변할 수 있는 과거의 유물로 취급됩니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러시아산 코드로 촘촘하게 짜인 내수용 소프트웨어들이며, 이들은 빠르게 현지인들의 삶 속에서 떼어낼 수 없는 유기적 결합체가 되었습니다. 얀덱스(Yandex), 카스퍼스키(Kaspersky) 등 이미 글로벌 수준의 앱이 모든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챗GPT 접근 금지가 불러온 ‘로컬 AI’의 반격

러시아의 AI <출처: 작가, gemini로 제작>

 

오픈AI의 챗GPT를 필두로 한 글로벌 생성형 AI 모델들이 러시아 IP를 차단하자, 러시아인들은 당황하는 대신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적 맥락에 최적화된 로컬 AI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애초에 영어 중심 사고방식과 서구권의 윤리적 가이드라인이 투영된 글로벌 모델들은 러시아어의 복잡한 굴절과 슬라브 민족 특유의 정서를 담아내는 데 한계가 있었습니다.

 

반면, 러시아의 얀덱스, 스베르(Sber)가 개발한 모델들은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의 문장을 학습하고, 러시아인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역사적 상징과 은유를 이해합니다. 이는 기술적 소외를 극복하는 차원을 넘어 오히려 자국 문화에 가장 적합한 ‘맞춤형 지능’을 소유하게 되는 역설적인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접근 금지라는 장벽이 오히려 러시아만의 독창적인 AI 학습 데이터셋을 구축하는 강력한 동력이 된 셈입니다.

 

이제 이런 모델은 전 세계가 획일화된 AI 표준을 따라갈 때 러시아만이 가질 수 있는 독보적인 문화적 경쟁력이 되었습니다. 그 어떤 AI보다도 러시아어에 최적화되었으며, 구글 검색이 어려운 러시아 내부 사이트까지 모두 학습의 대상으로 삼아 전체 내용을 아우르는 AI 서비스가 러시아 자국민들에게 제공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러시아인들의 필수 앱 리스트

러시아 필수 앱 목록 <출처: RuStore>

 

이러한 변화는 스마트폰 홈 화면에서 가장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앱들은 없지만, 그들이 제공하는 기능은 로컬 슈퍼 앱들이 대신하고 있습니다. 물론 러시아에서도 구글이나 애플의 앱스토어를 이용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루스토어(RuStore)라는 자국 앱스토어로 앱들을 관리합니다. 또, 러시아에서 필수로 통하는 앱들은 모두 전화번호 하나로 가입하고 관리할 수 있어, 사용 편의성에 있어서는 한국 앱들보다 더 뛰어난 측면도 있습니다.

 

러시아의 국민 메신저를 넘어 사회적 소통의 중심이 된 ‘VK’는 이제 SNS 그 이상의 기능을 수행합니다. 메일 서비스에서 시작한 플랫폼 '메일루(Mail.ru)'는 러시아 비즈니스의 혈관 역할을 수행합니다. ‘얀덱스 고(Yandex Go)’란 앱은 택시 호출, 음식 배달, 물류 배송, 심지어는 공과금 결제까지 하나의 앱 안에서 해결하는 거대한 플랫폼으로 성장했습니다. ‘텔레그램(Telegram)’ 역시 단순 메신저의 기능을 넘어 정부 행정 서비스와 금융 채널의 핵심 플랫폼으로 기능하며 러시아의 디지털 주권을 공고히 하고 있습니다.

 

모두 외부인에게는 낯설고 폐쇄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이 내수용 앱들은 이미 현지인들의 일상을 완벽하게 지탱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해졌습니다. 특히 이 모든 앱이 러시아 전화번호 하나로 인증할 수 있으니, 한국이나 미국에서 했던 인증 방식보다 더 편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2. 일상을 점령한 러시아표 AI와 핀테크

 

알리사(Alisa): 얀덱스가 탄생시킨 러시아판 ‘AI 페르소나’

Alisa AI <출처: yandex image>

 

러시아 AI의 정체성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존재는 얀덱스의 AI 비서 ‘알리사(Alisa)’입니다. 실리콘밸리의 AI 비서들이 기계적이고 가치 중립적인 답변을 내놓는 데 주력하는 것과 달리, 알리사는 마치 살아있는 러시아인처럼 행동합니다. 때때로 고집스럽게 의견을 피력하거나, 러시아 특유의 냉소적인 유머를 섞어 대답하기도 하며 사용자에게 당혹감과 친밀감을 동시에 선사합니다. 이러한 '인격적 페르소나'는 러시아인들에게 단순한 비서 이상의 유대감을 주며 문화적 동질성을 확인시켜 줍니다.

 

또한, 알리사는 러시아 내부에 특화된 서비스와 이어집니다. 앱들과의 연계는 자연스러우며, 서비스 속도 역시 자국 내에서 월등히 뛰어납니다. 가격 또한 챗GPT나 제미나이(Gemini)에 대비하여 저렴합니다. 물론 한글 학습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제가 한글을 입력하면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만, 러시아 자국민만을 놓고 본다면 절대적인 강점을 지닌 AI 서비스임이 틀림없습니다.

 

미르 페이(Mir Pay): 제재 속에서 꽃피운 독자적 결제 시스템의 생존법

미르 페이 <출처: yandex image>

 

금융 영역에서의 자립은 더욱 극적입니다. 국제 결제망인 SWIFT에서 퇴출당했을 때, 러시아 경제가 순식간에 붕괴할 것이라는 서구권의 예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습니다. 러시아는 이미 수년 전부터 준비해 온 독자 결제 시스템 ‘미르(Mir)’를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요즘 모스크바의 식당이나 지하철역에서 사람들은 비자나 마스터카드 대신 스마트폰의 '미르 페이(Mir Pay)'를 태그합니다. 외부의 금융 압박이 심해질수록 이 시스템은 더욱 정교하게 진화했고, 이제는 실물 카드 없이도 전국 어디서나 경제 활동이 가능한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곧 미르 페이는 애플 페이, 삼성 페이 등 페이 시스템의 빈자리를 훌륭하게 극복했습니다. 나아가 사용자 편의성을 추구하여 ATM에서 돈을 찾을 때나, 지하철 탑승 시에는 안면 인식을 통한 활용까지도 제공하고 있습니다.

 

로버: 모스크바 길거리를 누비는 자율주행 배달 로봇

배달하는 로버 <출처: yandex image>

 

거리의 풍경 또한 이곳 러시아가 자율주행 기술의 최전선임을 보여줍니다. 모스크바 도심의 무릎 높이까지 차오른 눈길을 얀덱스의 배달 로봇 ‘로버’들이 묵묵히 헤쳐 나가는 모습은 보고 있으면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영하 20도의 혹한과 빙판길이라는 가혹한 환경은 자율주행 알고리즘에게는 최악의 난제이지만, 러시아의 로봇들은 이를 극복해 냈습니다.

 

센서와 알고리즘의 결합체인 이 로봇들은 단순한 기술 과시용이 아니라, 만성적인 인력 부족과 가혹한 기후 조건을 해결하기 위한 실용적인 해답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모스크바 시내에서 돌아다니는 이 조그마한 배달 로봇들은 제재와 테러 등의 위험으로 비싸진 노동력을 대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점점 학습이 나아짐에 따라 더 빠르고 정확하게 상품을 배달하고 있습니다.

 

 

3. 철의 장막 뒤에서 진화하는 소버린 AI의 실체

 

얀덱스 vs 기가챗: 러시아 AI의 양대 산맥, 그들의 기술적 차별점

러시아 최대 IT 기업과 그들의 AI 서비스 <출처: 작가>

 

러시아 소버린 AI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얀덱스의 '얀덱스GPT'와 스베르의 '기가챗'이라는 두 거대 산맥이 존재합니다. 민간 기술력의 정점에 서 있는 얀덱스가 방대한 검색 데이터와 정교한 소비자 맞춤형 서비스에 강점을 보인다면, 국영 금융 그룹인 스베르는 국가적인 컴퓨팅 자원과 금융 인프라를 바탕으로 공공 영역의 지능화를 주도합니다.

 

이들은 서로 경쟁하면서도 외산 AI의 빈자리를 훌륭히 메우며 러시아 기술 생태계를 지탱하는 양대 기둥 역할을 수행합니다. 각기 다른 배경에서 탄생한 두 모델의 기술적 차별성은 러시아 AI 생태계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고 있으며, 국가가 주도한 기술 발전이 민간의 창의성과 결합했을 때 나타나는 시너지를 잘 보여준다고 느껴집니다.

 

러시아가 오픈소스에 진심인 이유: 고립된 땅에서 혁신을 지속하는 법

러시아의 개발자들 <출처: 작가>

 

러시아가 기술적 고립 속에서도 혁신의 끈을 놓지 않는 비결은 바로 ‘오픈소스’에 대한 집요한 접근에 있습니다. 러시아의 개발자들은 전 세계의 오픈소스 프로젝트를 실시간으로 분석하고 흡수하여 자신들의 폐쇄된 네트워크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형태로 재조립합니다. 외부와의 공식적인 기술 협력 통로는 차단되었을지 몰라도, 공개된 코드를 해체하고 최적화하는 과정을 통해 전 세계의 지능을 자신들의 주권 아래로 끌어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략은 고립된 환경이 어쩌면 외부 의존도를 낮추고 기술적 자생력을 키울 자양분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그들에게 오픈소스는 단순한 참조 도구가 아니라 생존 도구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늘 오픈소스를 학습하고 개발하는 개발자라면 배워야 할 자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폐쇄적 개발 환경의 역설: 외부 의존도를 0%로 만드는 극한의 최적화 전략

더불어 하드웨어 수급의 한계는 러시아 개발자들에게 소프트웨어의 ‘극한 최적화’라는 과제를 안겨주었습니다. 최신 고성능 GPU를 마음껏 사용할 수 없는 환경은 오히려 독이 아닌 득이 되었습니다. 제한된 연산 자원 내에서 거대 언어 모델을 구동하기 위해 그들은 알고리즘의 군더더기를 깎아내고 메모리 효율을 극대화하는 사투를 벌였습니다. 그 결과 가벼우면서도 강력한 러시아만의 독자적 모델들이 탄생했습니다.

 

풍요로운 환경에서는 결코 시도하지 않았을 이 결핍의 연금술이 러시아 기술진의 실력을 상향 평준화시켰다고 보입니다. 외부 의존도를 0%로 수렴시키려는 이들의 노력은 결국 기술적 한계가 어떻게 창의적인 혁신으로 변모하는지를 보여주는 역설적인 장면을 연출합니다.

 

 

4. ‘AI 배제 시대’를 준비하는 우리의 자세

 

소버린 AI는 선택이 아닌 생존: 러시아 사례가 던지는 지정학적 메시지

러시아의 지정학적 위험 <출처: foreignpolicy>

 

모스크바 현지에서 몸소 느낀 소버린 AI는, 단순한 기술 자립을 넘어선 국가의 명운을 건 사투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특정 국가나 거대 빅테크 기업에 기술의 주도권을 완전히 넘겨주는 것은 앞으로 발생할 어떤 위기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고 느껴졌습니다.

 

러시아는 비록 강제적인 방식이었지만, 자신들의 데이터와 지능을 스스로 통제함으로써 외부의 압력에 쉽게 굴하지 않을 디지털 요새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사례는 우리에게 AI 주권이 더 이상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안보와 직결된 생존의 필수 조건임을 경고하고 있지는 않을까요?

 

글로벌 종속과 독자 기술 사이: 한국형 소버린 AI가 나아갈 방향

우리나라 역시 이제 글로벌 빅테크가 제공하는 편리함이라는 달콤한 유혹과 독자 기술 개발이라는 고단한 길 사이에서 냉정한 선택을 내려야 할 시점에 서 있습니다. 이제는 국가 차원에서 네이버나 카카오 같은 로컬 기업들이 수십 년간 쌓아온 데이터 영토를 보호하고, 한글을 비롯해 한국의 가치를 온전히 반영한 '한국형 소버린 AI'를 국가적 인프라로 육성해야 할 때입니다.

 

기술의 주권이 흔들릴 때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쉽게 타인의 손에 의해 좌우될 수 있는지를 러시아란 나라는 명확히 보여줍니다. 모스크바의 매서운 눈바람을 뚫고 묵묵히 길을 찾아가는 배달 로봇처럼, 우리 역시 우리만의 기술적 해자를 구축하여 다가올 AI 패권 전쟁의 거센 파고를 당당히 넘어서야 합니다. 그것만이 디지털 대항해 시대에 대한민국이 자존감을 지키며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개발 생태계는 정부가 스스로 막은 것들도, 다른 국가에서 막은 것들도 많다 보니 늘 신기술에 대한 목마름이 넘쳐납니다. 그렇게 자체적으로 여러 세미나를 여는 등 기술 공부의 자리를 만들며 이를 키워 가고 있습니다. 저 또한 러시아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을 비롯해 한국 개발자에게 더 넓은 시야와 지식을 전파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다시 새로운 것을 전달하러 찾아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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