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5월 Figma는 'Config 2025'를 통해 바이브 디자인(Vibe Design)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이제 디자인은 구체적인 형태를 그리는 일이 아니라, 의도와 분위기 즉, 바이브를 언어로 제시하면 AI가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과정이 됐다. 그 중심에는 'Figma Make'가 있다. 디자이너가 '로그인 페이지를 다크모드로 만들어줘.'라고 입력하면 AI는 실제 작동 가능한 프로토타입을 자동으로 생성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디자인을 별도 개발 없이, 바로 웹사이트로 게시할 수 있고, 아이디어에서 실행까지의 간극을 없앴다.
'Figma Draw'는 브러시와 벡터, 텍스처 기능까지 강화해 Figma 안에서 일러스트레이션까지 작업할 수 있게 했다. Figma가 2025년에 발표한 여러 기능들은 모두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디자인의 중심이 '제작'에서 '의도'로, 손의 노동에서 머리의 판단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제 디자이너는 결과물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바이브를 구현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디렉터가 된다. Figma는 그렇게 생각의 스케치를 실시간으로 현실화하는 ‘Vibe Design’의 시대를 열었다. 이번 글에서는 ‘바이브 디자인’의 시대에서 이것이 디자이너에게 위기일지, 혹은 새로운 기회일지를 함께 생각해보고자 한다.

디자인을 만들어내는 속도는 평준화되고 있다. 하지만 결과의 질을 가르는 새로운 격차를 만들고 있다. 누구나 5분 안에 시안을 도출할 수 있게 되었지만, 시안을 판단하고 다듬는 능력은 여전히 사람에게 달려있다.
내가 ‘Figma make’를 처음 써보았을 때, 디자이너라기보다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된 기분이었다. 프롬프트 한 줄만 입력하면 시안이 나타났다. 이제 실현의 영역은 누구나 할 수 있고, 스킬의 시대가 저물었다는 것을 느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잘 만드는가가 아니라 ‘왜 그 결과를 선택해야 하는가’를 판단할 줄 아는 감각이었다. 그 순간 나는 디자이너가 아니라 '방향을 정하는 사람'으로 서 있었다.
속도의 혁신이 일어난 자리에서 진짜 경쟁력은 판단의 깊이로 옮겨가고 있다. 도구는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어지지만 그 결과를 어떻게 해석하고 선택하느냐에 따라 결과의 격차가 벌어진다. 5분 안에 해결되는 얕은 디자인적 문제는 AI가 점차 전담하게 될 것이다. 그 대신 디자이너는 초안을 검토하고, 맥락을 보완하면서 때로는 처음부터 다시 프롬프트를 설계하는 과정을 반복할 것이다. 디자인을 완성해 가는 새로운 협업 구조가 만들어질 것 같다. 이 과정에서 진짜 차이를 만드는 것은 디자인을 읽어내는 안목과 판단의 깊이다. 이 부분만큼은 아직 대체되기 어렵다.
이렇게 되면 실력 격차는 더 크게 벌어지게 된다. 같은 도구를 사용하더라도 누군가는 구조를 설계하고 맥락을 제시하지만, 누군가는 같은 결과물만 반복하며 깊이를 잃는다. AI는 방대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결과물을 기하급수적으로 확장시켜줄 수 있지만, 그 결과를 어떻게 해석하고 다루느냐에 따라 디자이너의 역량 차이는 더 커질 것이다. 기술의 평준화가 곧 안목의 양극화로 이어지는 이유다.
결국 이 격차를 만드는 것은 기술의 한계가 아닌 인간의 사고 구조다. AI는 이미 충분히 빠르고 정확하지만, 그 앞에서 멈추는 이유는 '무엇을 원하고 왜 그것을 만들고 싶은지'를 스스로 명확히 표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격차를 가르는 것은 두 가지 경쟁력이다. 첫 번째는 생각을 명확히 언어화하는 힘이고, 두 번째는 보이지 않는 질을 구별하는 감각이다.

AI는 결과를 빠르고 효율적으로 잘 도출한다. 문제는 이 결과를 위해서 '프롬프트'를 입력해야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뭘 원하는지 수월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프롬프트 엔지니어링' 자체는 생각의 장벽을 기술로 구현하는 일시적인 기술일 수 있다. 진짜 어려운 것은 직접 생각하고, 그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최근에 마케팅·기획 보조용 챗봇을 설계했다. 이 챗봇은 타깃별 퍼소나를 자동 생성하고, 개별 타깃과 전체 고객 간의 비교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AI가 생성한 초안은 너무 쌩뚱맞았다. 빠르게 시안을 원했지만, AI는 맥락을 모른 채 표면적인 구조를 제시했다. 결국 내가 해야 했던 일은 단순한 수정이 아니라, ‘왜 이런 결과를 요구했는지’라는 의도를 AI가 이해할 수 있게 번역하는 일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생각을 언어로 번역하지 못하면 기술은 오히려 소음을 낸다는 것을. 프롬프트를 잘 쓰는 능력보다, 맥락을 해석하고 의도를 전달하는 능력이 더 중요해졌다.
그래서 나는 '언어로 사고하는 힘'을 기르기 위해 두 가지 루틴을 꾸준히 반복한다. 하나는 ‘질문 쓰기’다.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본 뒤, 인상 깊은 문장 하나를 고르고 ‘왜 이 문장이 나를 멈춰 세웠는가’를 스스로 묻는다. 그 이유를 짧게 써보는 것만으로도 내 사고의 구조가 정리된다.
두 번째는 ‘경험을 언어로 남기는 일’이다. 브런치에 내가 직접 사용해 본 서비스나, 프로젝트 경험을 의도적으로 꾸준히 기록한다. 단순한 리뷰가 아니라 '왜 이런 느낌이 들었을까.', '무엇이 나를 불편하게 했을까.'라는 질문을 붙여 쓰는 방식이다. 이렇게 경험을 문장으로 옮기면, 감정이 아닌 구조로 사고하게 된다. 결국 언어화 능력은 단순히 AI에게 잘 시키는 기술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감각을 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한 훈련이다.
생각 없이 살아가기 쉬운 시대다. 수많은 자극 속에서 '자기 생각'은 없이 반응만 하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자신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그걸 어떻게 표현할지를 아는 일은 단순한 스킬이 아니라, 역량이 되어버렸다. 이런 맥락에서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은 기술이 아닌 사고를 드러내는 거울이라고 생각한다. 생각을 표현하는 능력, 그것이 첫 번째 경쟁력이다.

안목 역시 기르기가 힘들고 인간만이 갖출 수 있는 중요한 경쟁력이다. AI가 아무리 많은 데이터를 학습해도 '무엇이 적절한가'를 판단하는 감각은 인간의 몫으로 남는다. 이 감각은 단시간에 생기지 않는다. 수많은 경험을 해보고 비교하고, 해석하는 과정을 통해 서서히 쌓이는 역량이기 때문이다. 많이 본다고 해서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보고 생각하고 정리하는 훈련이 반복되어야 한다. 즉 '본 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내면화의 과정이 필요하다. 그래서 안목을 기르는 일은 결국 '판단의 경험'을 얼마나 쌓았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판단의 경험'을 쌓기 위해 의도적으로 다양한 AI의 프롬프트를 실험해 본다. 같은 주제를 미드저니, 제미나이에서 각각 시안으로 만들어본 뒤 '무엇이 다르고 왜 다른지, 서비스마다 무엇이 강점인지'를 분석하고 기록한다. 그 차이를 언어로 정리하면서 시각적 판단력이 훨씬 선명해진다. 디자인 시안들 중 왜 이런 디자인이 좋았는지를 요약해 기록해 보기도 한다. 이런 기록이 쌓이면 내 안의 기준이 생긴다. 결국 안목은 데이터를 보는 눈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비교하고 해석한 흔적에서 길러진다. 이건 단순히 ‘많이 보는 일’이 아니라, ‘본 것을 자기 언어로 정리하는 일’이다.
AI의 시대의 디자인은 더 이상 무(無)에서 새로 만드는 창작 과정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 존재하는 수많은 결과물 중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왜 그것이 옳은가를 설명하는 과정으로 바뀌고 있다. AI가 초안을 만들고 사람은 그 결과를 해석하며 방향을 제시한다. 결국 바이브 디자인은 무엇을 만들었는가보다, 어떤 마음으로 만들었는가를 드러내는 과정이 되었다.

AI의 한계는 철저히 감정이 없다는 것이다. AI가 구현할 수 없는 궁극의 주관성은 결국 인간의 애착, 사랑에서 나온다. AI 시안에서 느껴지는 뭔가 아쉬움은 기술의 한계가 아니라, 애정의 결핍 때문에 느껴진다. 한번은 상무님께서 챗봇 동향 보고서를 지시했는데, 누군가 제출한 자료는 겉보기엔 풍부했다. 그러나 읽다 보면 AI가 분석한 보고서 내용을 짜깁기한 결과물임을 알 수 있었다. 구조에 맥락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때 애정이 없는 결과물은 아무리 정확해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는 걸 느꼈다.
또 누군가는 보고서를 다시 고쳐 썼다. 물론 AI의 도움을 받았지만, 상무님이 가장 알고 싶은 핵심을 중심에 두었다. '이 사람이 어떤 의도로 어떤 시점에, 왜 이 기능을 물어보는가?'라는 질문 하나에 애정을 담은 결과물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AI의 한계는 따뜻함의 부재다. 이때 인간은 '사랑을 불어넣는 역할'을 한다. 애정이 있어야 보이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보고서에 따뜻함을 담은 팀원은 우리 조직의 보고가 진심으로 잘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일한 것이 느껴졌다. 진정한 애정이 없다면 따뜻함조차 불어넣을 수 없다. 모든 일이 결국 '관계'에 대한 언어이기 때문이다.
AI에게 프롬프트를 잘 설정해 주면 '틀린 답'을 주지 않지만, 그렇다고 최고의 답을 보장하진 않는다. 그래서 더더욱 '애정의 결핍'이 느껴지는 획일화된 AI 시안을 마주할 때마다, 디자이너는 자신의 안목을 믿고 거부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AI 시대에도 여전히 독보적인 감각을 가진 사람들을 보면, AI가 제안한 시안을 거절하거나 참고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AI 결과물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는다. AI가 만들어내는 결과물은 놀랍도록 빠르지만, 그 속에는 비슷한 '바이브'가 깔려 있다.
누구나 그럴듯한 이미지를 만들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미지가 '나의 것'인지 'AI 것'인지는 금세 드러난다. 뛰어난 디자이너는 그 홍조 속에서 자기 바이브를 지키는 필터링 기술을 갖고 있다. 이 능력은 용기를 가진 사람에게만 생긴다. 어찌 보면 실제 뛰어난 디자이너들이 가장 잘하는 일은 '판단의 중심'을 정하는 것이다. AI가 제안한 시안을 거절할지, 수정할지, 받아들일지를 빠르게 판단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내가 프롬프트를 잘못 쓴 걸까?", "내 생각을 명확히 표현하지 못한 건 아닐까?" 이런 불안을 느끼겠지만, 결과물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AI의 시대에 기회는 도구를 빨리 익히는 사람에게 오지 않는다. 거부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거부 속에서도 자기 바이브를 잃지 않는 사람에게 찾아온다. AI의 속도는 모두에게 주어졌지만, 자기 결을 지켜내는 감각은 오직 용기를 가진 자만의 것이다.
AI 도입으로 협업 방식이 완전히 달라졌다. 사람 사이에 불필요한 감정 소모는 줄어들었지만 너무나 당연하게 그만큼 진심 없는 일이 늘었다. AI와 협업하는 일이 너무 당연해지자 일의 온도가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 이제 조직의 문제는 직무의 분리가 아닌, 누가 더 애착을 갖고 있는가로 구분될 수밖에 없다. 개발자가 시스템을 사랑한다면 그게 문제를 해결할 것이고, 디자이너가 서비스에 애착이 있으면 그가 방향을 제시할 것이다. AI 시대의 진짜 역량은 직함이 아니라, 오너십의 강도에서 드러난다.
한 번은 차량 내 인터랙션 화면 설계 프로젝트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AI가 만들어준 첫 초안은 채팅형 UI였다. 단순히 버튼만 수정하면 됐지만, 그 방향이 이해되지 않았다. 운전 중인 사용자는 텍스트를 읽지 않는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정보’가 아니라 ‘즉각적인 조작감’이었다. 그래서 사용자가 특정 모드를 인식하기보다, 기능을 자연스럽게 느끼는 구조로 개편했다. 그 과정을 통해 깨달았다. AI가 초안을 만들 수는 있어도, 방향을 결정하는 건 결국 사람의 애착임을, 그게 바로 오너십이다.
결국 이 시대의 디자인은 ‘무엇을 만드는가’의 문제에서 ‘왜 그것을 선택했는가’의 문제로 이동했다. 빠르게 만드는 능력은 평준화되었지만, 판단의 깊이와 애정의 밀도는 여전히 사람의 몫이다. 이제 디자이너에게 필요한 것은 기술보다 감각, 감각보다 의도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태도다. AI가 수많은 가능성을 제시할 때, 우리는 그중 어떤 결과가 '우리의 언어'에 가까운지를 읽어내야 한다.
도구의 시대가 끝나고, 생각의 깊이가 모든 격차를 만드는 시대가 왔다. 이제 우리는 얼마나 깊이 생각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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