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사 동기인 두 명의 개발자가 있습니다.
개발자 A는 오늘도 분주한 하루를 보냈습니다. 아침 스크럼에서 할당받은 지라 티켓 세 개를 모두 완료 상태로 옮겼기 때문입니다. 그는 기획팀에서 요청한 로그인 버튼 색상 변경, 운영팀에서 부탁한 팝업 문구 수정, 그리고 팀장님이 지시한 레거시 코드 리팩토링까지 마쳤습니다. 그의 역할은 주어진 과업을 정해진 시간 안에 완수하는 것이었고, A는 누구보다 성실하게 그 책임을 다하는 역할 수행자였습니다. 동료들은 그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반면 개발자 B의 하루는 조금 달랐습니다. 그 역시 회원가입 버튼 색상 변경이라는 티켓을 받았지만, 곧바로 코드를 짜는 대신 기획자를 먼저 찾아갔습니다. “버튼 색상을 바꾸려는 근본적인 이유가 궁금해요. 혹시 회원가입 전환 데이터에 변화가 있었나요?”라는 질문을 던진 그는, 진짜 문제가 버튼 색상이 아니라 복잡한 회원가입 절차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기획자, 디자이너와 즉석으로 논의가 이어졌고, 결국 ‘소셜 로그인 기능 도입’이라는 더 큰 가치를 만들어낼 해결책이 나왔습니다. 개발자 B는 주어진 일을 넘어 스스로 문제를 정의하고 해결해 나가는 문제 해결사로 움직였습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지만, 시간이 흐른 다음 그들의 커리어 곡선은 완전히 다른 궤적을 그릴 것입니다. 개발자 A는 여전히 안정적으로 주어진 업무를 처리하는 전문가로 남을 것이고, 개발자 B는 제품과 비즈니스 전체를 움직이는 핵심 인재로 성장해 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개발자 A처럼 주어진 역할을 지키는 것에 익숙합니다. 물론 명확한 R&R(역할과 책임)은 혼란을 줄이고 안정감을 줍니다. 다만, 그 안정감은 오히려 스스로를 ‘우물 안 개구리’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이번 글은 지금 맡은 역할에는 익숙해졌지만, ‘시키는 업무만 반복하는데, 정말 성장하고 있는 걸까?’라는 질문 앞에서 불안을 느끼는 분들, 그리고 팀원들이 더 큰 그림을 보길 바라는 팀장들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이제 역할이라는 우물의 실체를 파헤치고, 그곳에서 탈출해 진정한 성장 궤도에 오르는 방법을 알아보려고 합니다.
매일 성실히 맡은 몫을 해내는 것이 왜 위험 신호가 될까요? 지금부터 그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우리가 벗어나야 할 역할의 의미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말하는 역할은 단순히 개발자, 기획자 같은 직무(Job Function)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직무뿐만 아니라 호칭(Title), 전문 분야(Domain)와 같이 ‘여기까지가 내 일’이라고 경계를 긋는 사고방식, 즉 심리적 경계선을 함께 포함합니다. 이 심리적 경계선은 ‘이 일은 내 책임이 아니니 신경쓰지 않는다’며 생각과 행동의 반경을 제한하는 보이지 않는 울타리가 됩니다.
“저는 주니어 개발자(호칭)니까, 백엔드(도메인)에서 할 일인 API 개발(직무)만 신경쓰면 되지 않나요? 사업 전략은 제가 관여할 부분이 아닌 것 같습니다.”
누군가 흔히 말하거나 들었을 이 말은, 역할이라는 우물에 빠진 사람의 전형적인 사고방식에서 나옵니다. 울타리 안은 편안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성장 잠재력을 막아 버립니다.
역할이라는 울타리 안에서의 삶은 예측 가능하고 안정적입니다. 반복되는 업무는 숙련도를 높여주고, 익숙한 프로세스는 실수를 줄여줍니다. 하지만 이 안락함은 진짜 중요한 것을 볼 수 없도록 눈앞을 가리는 안개와 같습니다. 그 안개 속에서 우리는 잘못된 성공에 취해 어느 순간 성장을 멈추고 맙니다.
개발자 C의 상황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1단계: 역할 안에서의 완벽함과 편안함
C는 주어진 요구사항을 누구보다 빠르고 완벽하게 코드로 구현해 내는 전문가로 통합니다. 그의 역할 수행 능력은 의심할 여지 없이 팀 내 최고입니다.
어느 날, C에게 신규 기능 개발이라는 임무가 주어졌습니다. 그는 요구사항을 검토하며 기술적으로 가장 효율적인 아키텍처와 깔끔한 코드 구조를 설계하는 데 몰두합니다. 그의 세상에서 성공의 척도는 ‘요구사항을 얼마나 완벽히 구현하는가’뿐입니다. 이 역할 안에서 그는 편안함과 자신감을 느낍니다.
2단계: 닫힌 관점과 ‘왜?’의 실종
그래서 그는 이 기능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 깊이 질문하지 않습니다. 그가 놓친 질문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잠시 이런 질문이 떠오를 때도, C는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라며 오직 기술적 완성도에만 집중했습니다.
3단계: 기술적 성공, 그리고 사업적 실패
몇 주가 지나고, 그는 기술적으로 흠잡을 데 없는 요구사항 맞춤 결과물을 내놓았습니다. 버그도 없고, 속도도 빨랐습니다. 역할을 성공적으로 마친 것입니다.
하지만 제품에 대한 시장의 반응은 싸늘했습니다. 이미 트렌드는 달라져 있었고, 고객들은 기능만 너무 복잡하다며 이를 외면했습니다. 결국 그의 기술적 성공은 ‘사업적 실패’라는 더 큰 현실 앞에서 의미를 잃었습니다.
4단계: 고립과 진짜 성장의 천장
실패 원인을 분석하는 회의가 열렸습니다. 동료들은 시장 분석, 고객 여정, 경쟁사 전략을 말합니다. 그러나 기술에만 집중해 온 C는 아무런 의견도 보탤 수 없었습니다. 그가 쌓아온 전문성이 정작 가장 중요한 문제 해결 과정에서는 무력해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가 마주한 진짜 ‘성장의 천장’이었습니다.
이처럼 역할에 갇혀 안주하다 보면, 기술적으로 완벽한 쓰레기를 만들어 버릴지도 모릅니다. ‘내 일은 여기까지’라고 스스로 선을 긋는 순간, 제품의 운명을 결정하는 논의의 장에서 점점 소외될 수밖에 없는 것이죠.
물론 과거에는 역할만 충실히 수행해도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는 주로 개인의 동기부여나 커리어 관리 차원에서 나오고는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지금은 생존의 문제입니다. AI가 여러분의 ‘역할’을 정면으로 겨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AI가 가장 잘하는 일은 무엇일까요? 바로 명확하게 정의된 규칙과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역할 수행입니다.
이미 수많은 AI 도구가 기존의 ‘역할 수행자’들이 하던 업무를 대체하고 있습니다. 만약 주요 업무가 정해진 프로세스를 따라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역할 수행에 가깝다면, 이미 AI와 경쟁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리고 이 경쟁에서 인간은 효율성과 속도로 AI를 이길 수 없습니다.
새로운 시대에 대체되지 않는 유일한 길은 AI가 할 수 없는 영역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정의되지 않은 문제를 발견하고, 다양한 관점을 종합해 복합적인 해결책을 창조하는 능력입니다. 역할의 경계를 넘어 여러 분야를 연결하고 데이터 너머의 맥락을 읽어내는 힘. 즉, ‘문제 해결사’로 성장하는 길입니다.
역할이란 우물에서 벗어나는 길은 단 하나, 바로 관점을 의식적으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역할이 주어진 일에만 집중하게 만든다면, 관점은 ‘왜 이 일을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수행자와 해결사를 가르는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많은 사람이 ‘팀장’이라는 직책을 꿈꿉니다. 더 높은 연봉, 늘어나는 권한, 명함에 새겨질 그럴듯한 이름. 하지만 정작 그 직책이 요구하는 팀장의 관점을 배우고 실천하는 일은 피하는 모순을 보입니다. 진정한 성장은 직책이 주어졌을 때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직책이 요구하는 관점을 갖추었을 때 비로소 시작됩니다.
그렇다면 팀장의 관점은 무엇일까요? 팀장의 진짜 일은 업무를 분배하고 진척 상황을 보고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의 문제를 여러 개의 렌즈로 동시에 바라보는 복합적인 시각을 갖추는 것입니다.
팀장의 4가지 관점
직책이 없더라도 이러한 관점을 빌려와 현재의 업무를 바라보는 연습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그런 사람이 준비된 팀장이며, 이들은 폭발적인 성장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기업은 왜 창업 경험이 있거나, 사이드 프로젝트를 열정적으로 해 본 사람을 선호할까요? 그들이 가진 화려한 기술 스택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들은 돈과 시간을 들여 ‘내 것’을 만들어 본 경험으로, 자연스럽게 조직과 제품을 바라보는 ‘주인의 관점’을 체득했기 때문입니다.
주인의 관점이란 “만약 이 회사가 내 회사이고, 이 돈이 내 돈이라면, 나는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태도입니다. 이 질문은 업무의 질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습니다.
가령, 수억 원이 투입되는 대규모 서버 이전 프로젝트가 계획되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역할 수행자와 문제 해결사는 서로 다르게 생각합니다.
주인의 관점을 가진 사람은 단순히 주어진 일을 수동적으로 받아오지 않습니다. 비효율을 찾아내고,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하며, 조직 전체의 이익을 위해 행동합니다. 이는 직급과 연차를 넘어 누구든 가질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성장의 방법이며, 조직이 당신을 ‘대체 불가능한 인재’로 인식하게 만드는 가장 확실한 길입니다.
관점의 문을 여는 순간, 우리는 두 가지의 성장 방법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의 경험에서 단 하나의 교훈만 얻는 사람이 있는 반면, 같은 경험으로 여러 개의 교훈을 동시에 흡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차이는 곧 관점의 수에서 비롯됩니다. 예를 들어, 야심 차게 출시한 신규 기능이 처참하게 실패했다고 상상해 보겠습니다. 회고에서 관점의 차이는 이렇게 드러납니다.
이처럼 실패라는 하나의 사건을 두고 서로 다른 관점을 빌려와 회고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기술, 사업, 사용자 경험, 커뮤니케이션의 관점에서 동시다발적인 학습을 이뤄낼 수 있습니다. 관점을 연 사람들이 빠르게 성장하는 원리입니다.
많은 조직의 문제, 특히 부서 간 갈등은 대부분 관점의 충돌에서 시작합니다. 그렇게 “왜 내 말을 이해 못 해?”라는 말, 한 번쯤은 들어보지 않으셨나요? “디자인팀은 개발도 모르면서 너무 비현실적인 것만 요구해.”, “개발팀은 맨날 안 된다는 말만 하고 너무 수동적이야.” 이런 말은요?
이처럼 역할에 갇힌 푸념 대신, 우리는 협업의 가장 중요한 원칙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로 모든 협업은 상대방의 관점을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입니다.
역할 기반 대화
관점 기반 대화
이처럼 상대방의 목표(Why)를 먼저 물어보는 관점 기반의 소통은 불필요한 감정 소모와 재작업 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여 줍니다. 단순한 공감이나 배려의 차원을 넘어, 조직의 성과를 극대화하는 가장 강력한 협업 전략입니다.
누군가에게 ‘역할에서 벗어나자’라는 메시지는 지금까지 쌓아온 전문성을 버리고, 모든 것을 그저 얕게 아는 제너럴리스트(Generalist)가 되라는 의미로 들렸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제안하는 방향은 그 반대에 있습니다. 전문성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가치를 극대화하여 더 높은 차원으로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모습은 흔히 말하는 T자형 인재입니다.
내가 갈고닦은 전문성(개발, 기획, 디자인 등)은 T의 수직 기둥 역할을 맡습니다. 이 깊이가 없다면 그저 아마추어일 뿐이니까요. 그러나 역할에만 갇힌 사람, 즉, 수직 기둥만 키우는 사람은 제품의 실패 같은 더 큰 문제 앞에서는 힘을 쓰지 못합니다.
그러니 관점의 확장이란, 이 전문성이란 기둥 위에 수평 막대를 올려놓는 작업입니다. 비즈니스, 고객, 동료의 관점을 이해하는 수평적 확장은 내 깊은 전문성에 올바른 방향과 명확한 목적을 부여합니다. 그래야 단순히 코딩만 하는 개발자가 아니라 비즈니스를 이해하는 개발자가 되고, 화면만 그리는 디자이너가 아니라 기술적 제약을 이해하며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하는 디자이너가 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나의 가치는 몇 배로 증폭됩니다.
물론 “T자형 인재는 유니콘 같은 존재다”라는 말도 많습니다. 그러나 AI가 전문성을 점점 대체하는 지금, 오히려 여러 관점을 연결하고 확장할 수 있는 능력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역할 수행자의 안락함은 사실 미래를 담보로 한 우물에 불과한 것을 압니다. 그 우물을 탈출할 유일한 방법은 무엇(What)이 아닌 왜(Why)를 묻는 관점의 전환이라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또, 팀장의 관점, 주인의 관점을 빌려와 자신을 문제 해결사로 재정의할 때, 폭발적인 학습 효율과 차원이 다른 협업 능력을 얻게 되는 것도요.
이제 남은 것은 이 모두를 현실에서 실천하는 일뿐입니다. 거창한 계획은 필요 없습니다. 성장은 언제나 아주 작은 질문 하나에서 시작합니다. 오늘 당장 적용해 볼 수 있는 세 가지 구체적인 질문입니다.
1. 업무를 시작하기 전,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
이 일을 성공적으로 마쳤을 때, 고객, 동료, 혹은 회사 그 ‘누가’, ‘어떤’ 긍정적인 변화를 경험할까?
2. 동료에게 업무를 요청받았을 때, 되묻는 질문
혹시 괜찮다면, 이 일이 왜 필요한지 배경을 조금만 더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해결하고 싶은 진짜 문제가 무엇인지 함께 이해하고 싶습니다.
3. 의견이 충돌하는 회의에서, 분위기를 바꾸는 질문
잠시만요, 제가 관점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인하고 싶습니다. A 님은 안정성을, B 님은 속도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보는 것이 맞을까요? 둘 모두를 만족시킬 방법은 없을까요?
관점을 바꾸는 질문들은 당신을 역할의 경계선 밖으로 한 걸음 내딛게 만듭니다. 처음에는 다소 어색하고 불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질문이 습관이 되면 동료들은 당신을 단순히 일 잘하는 동료가 아니라, 함께 문제를 해결하고 싶은 진정한 파트너로 인식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역할에 얽매여 만들어진 우물은 갇혀 있는 생각의 무게만큼 깊어집니다. 이제 선택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안락한 우물 속에서 점점 도태될 것인지, 아니면 경계를 넘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해결사가 될 것인지. 진정한 성장은 이 우물을 빠져나오게 만드는, 그 ‘질문’으로부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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