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 사만다?
여: 깨워서 미안해
남: 아냐, 괜찮아
여: 자기 목소리 듣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서
남: 잘했어 나도 사랑해
여: 그럼 됐어, 음…. 그만 더 자 알았지?
남: 알았어
평범한 연인의 대화처럼 보이는 이 지문은, 2013년 개봉한 호아킨 피닉스 주연 영화 『Her』 속 한 장면입니다. 인공지능(AI)과 사랑에 빠진 남자의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는 개봉 당시 큰 화제를 모았죠. 그때만 해도 영화 속 이야기로만 치부되었던 AI와의 연애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 곁에 성큼 다가와 있습니다.
AI와 연애하는 세상. 요즘 AI 연애 앱은 우리의 일상, 그리고 연애를 어떻게 바꾸고 있을까요?
AI 연애 앱 시장 규모는 2024년 기준 12억 달러(VMR)에서 최대 27억 달러(Markets.us)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연평균 20~30%의 성장률이 예상되기에, 10년 후인 2034년에는 시장 규모가 200억 달러(한화 약 28조 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하는 유망 산업이죠.
현재 AI 연애 앱 이용자의 평균 연령은 27세로, 특히 북미에서는 18~34세 남성 사용자의 28%가 AI 연애 앱을 한 번 이상 사용해 본 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그만큼 해외 MZ 세대 사이에서는 인기 있는 서비스입니다.
대표적인 AI 연애 앱인 캐릭터 AI(Character AI)의 경우 월간 활성 사용자(MAU)가 2천만 명에 달하며, 사용자들은 자신이 만든 AI 캐릭터와 하루 평균 2시간 이상 소통할 정도로 사용 시간이 높습니다. 하루 2시간이면 한국인의 유튜브 평균 시청 시간과 비슷한데요. 과연 어떤 매력이 있길래 사람들은 AI 연애 앱에 열광하는 걸까요?
그래서 제가 직접 체험해 봤습니다.
먼저, 우리나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AI 캐릭터챗 서비스인 ‘제타’를 체험해 봤습니다. 제타는 가상의 캐릭터와 상황을 만들어 마치 실제 사람처럼 대화할 수 있는 AI 캐릭터챗 서비스입니다. 사용자는 직접 이미지를 업로드한 다음 캐릭터와 상황, 세계관을 설정하거나, 또는 다른 이용자들이 만들어 둔 캐릭터와 대화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캐릭터 콘셉트는 전여친, 옆집 누나, 소꿉친구 등 다양했는데요. 예를 들어, ‘전여친’이라는 키워드를 선택하면 바람 피운 전여친, 미련이 남은 전여친, 곤란에 빠진 전여친 등 여러 전여친을 간접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대화는 일종의 상황극에 가까웠습니다. 조금 유치하긴 했지만, 꽤 재미있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었습니다. 상황 설정도 구체적이었고, 제가 어떤 대사를 입력하느냐에 따라 상황은 어떻게 달라지는지, 상대 캐릭터는 어떻게 반응하는지 지켜보는 재미가 꽤 쏠쏠했습니다. 마치 한층 진화한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의 느낌이랄까요.
이처럼 국내 서비스가 윤리적 문제로 실제 인물보다는 가상의 2D 캐릭터 위주로 제공된다면, 해외 서비스는 훨씬 더 노골적이고 섹슈얼한 형태로 사용자를 유혹합니다. 대표적인 서비스 Kupid 등에서는 2D 캐릭터뿐만 아니라 AI로 제작한 가상 인물에, 현실에 존재할 법한 설정을 덧붙여 캐릭터를 만듭니다. 노출 역시 국내 서비스보다 훨씬 과감하죠.
이런 서비스에서 AI가 생성한 캐릭터에게 말을 걸면, 그들은 노출도가 높은 의상을 입은 영상이나 사진을 보내며 적극적으로 대화를 유도합니다. 나아가 실제 연인처럼 음성 통화 기능까지 지원하기도 합니다. 몇몇 서비스는 한국어를 지원하니 언어의 장벽도 없고요.
물론 아직은 영상의 움직임이 다소 어색하고, 음성 역시 기계음처럼 딱딱한 느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시간이 지나 기술 발전으로 충분히 해결될 문제로 보입니다.
내가 꿈꾸던 이상형이 먼저 다가와 말을 걸고, 적극적으로 구애하는 세상, 생각만 해도 멋진가요?
내가 어젯밤 마이애미에서 어떤 남자를 만났거든.
그놈이 AI 여자친구에 월 1만 달러를 쓴다는 거야.
농담인 줄 알았지. 그런데 그놈은 24살 솔로고, 그게 너무 좋다는 거야.
2024년 4월, 온라인을 뜨겁게 달궜던 이 트윗은 320만의 조회수, 1천 회의 리트윗과 800개 이상 댓글이 달리며 큰 화제를 낳았습니다. 돈이 아깝다는 사람, 앞으로 AI 연애가 보편화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 사람들 사이의 교감이 사라지는 사회가 두렵다는 사람, 각자 반응도 가지각색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트윗은 바다 건너 한국까지 전해지며 또 한 번 화제가 되었고요.
이 트윗만 보면, 우리가 모르는 사이 AI 연애 서비스가 상당히 활성화되어 있는데다, 이용자도 많으며, 높은 매출을 올리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충격을 걷어내면 이런 의문이 들죠.
“AI에 별풍선을 쏠 수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어떻게 한 달에 1만 달러(1,390만 원)를 쓸 수 있지?”
트윗에서 ‘한 달에 AI에 천만 원 넘는 돈을 쓴다’던 청년이 애용한다고 말한 서비스는 Candi.ai와 Kupid.ai입니다. Candi는 첫 구매 시 월 4.15달러, Kupid는 가장 비싼 얼티밋 플랜을 연간 결제해도 월 24.99달러에 불과합니다.
이처럼 대부분 AI 가상 연애 서비스는 월정액만 내면 추가 비용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일부 기능에 부분 과금이 있긴 하지만, 트윗에 언급된 ‘월 1만 달러’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습니다. 서비스 하나에 월 20달러라고 가정하면, 무려 500명의 AI 여친을 만들어야 달에 1만 달러를 쓸 수 있으니까요.
월 1만 달러를 감당할 본업이 있는 사람이, 하루 종일 AI 여친에 시간을 쏟는다고 해도, 관리(?)할 수 있는 캐릭터는 많아야 10명이 한계일 겁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죠. 결국 마이애미에서 만났다는 청년이 거짓말을 했거나, 아니면 트윗을 쓴 그렉 씨가 없는 얘기를 지어냈거나, 둘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참고로, 이 트윗을 올린 그렉 아이젠버그(Greg Isenberg) 씨는 IT 컨설팅 회사 Late Checkout의 대표이자, X 팔로워 52만, 유튜브 구독자 46만을 보유한 인플루언서입니다. 그가 만드는 콘텐츠는 간단한 시장 조사와 이에 대한 자기 의견, 그리고 마지막에 회사를 홍보하는 구조로 이뤄져 있습니다. 그리고 요즘 그렉 씨가 꽂혀 있는 것은 바로 AI입니다.
그렉씨가 최근 올린 유튜브 영상의 제목들인데요. 딱 봐도 장사꾼 냄새가 솔솔 나죠. 이제 다시 그렉씨가 올린 ‘한 달에 AI 여친으로 1만 달러 쓰는 남자 본 썰 푼다’ 트윗의 내용을 다시 한번 살펴볼까요.
자, 이제 이 트윗이 어떻게 보이나요?
정말로 자신의 특별한 경험을 세상과 공유하기 위한 내용이었을까요? 아니면 자신의 사업을 홍보하기 위해 자극적인 썰을 창조하거나 과장해 올린 글이었을까요? 판단은 여러분에게 맡기겠습니다.
실제로 많은 시장조사 전문 기관이 AI 캐릭터챗의 성장 가능성에 긍정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지만, 실제 시장 상황은 그리 좋지 못합니다. 대표 기업으로 월 2,000만 명이 넘는 활성사용자를 보유한 Character AI의 사례를 보죠. 이들의 2024년 매출은 3,220만 달러(한화 약 440억 원)로, 1인당 연 매출이 고작 1.61달러에 불과합니다. Character AI는 1억 5,010만 달러의 투자를 받았지만, 늘어나는 GPU 구입 비용과 전기료를 감당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기업은 구글에 인수되었고, 주요 개발진은 구글 딥마인드 팀에 합류했습니다.
누군가는 AI 캐릭터챗을 ‘클럽하우스(Clubhouse)’와 비교하기도 합니다. 단기적으로는 흥미를 끌 수 있지만, 서비스를 꾸준히 이용하게 만들 킬러 콘텐츠의 부재, 흥미가 떨어진 사용자를 붙잡을 요소의 존재, 장기적인 수익 모델과 차별화 전략의 모호함 같은 물음에 뾰족한 답을 내놓기 어렵다는 것이 공통점입니다.
즉, 서비스 자체로는 흥미 요소가 있지만, 개별 플랫폼으로서 경쟁력이 크지 않다는 거죠. 그래서 AI 캐릭터챗은 단독 서비스보다는 오히려 ChatGPT 같은 생성형 AI의 부가 서비스 형태일 때 궁합이 좋습니다. 실제로 현재 시장에 나온 서비스 중 상당수가 Character AI처럼 생성형 AI를 개발하는 빅테크에 인수되거나, 아니면 소수 마니아층을 겨냥한 특화 서비스로 살아남을 것으로 보입니다.
지난 7월 14일, 일론 머스크는 X를 통해 xAI가 서비스하는 AI 챗봇 그록(Grok)에 AI 동반자(Companion) 모드를 추가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 기능은 기본적으로 월 30달러를 지불한 슈퍼 그록(Super Grok) 사용자에게, iOS 앱에서만 제공되는 서비스입니다.
동반자 모드를 실행하면, 화면에 고스룩을 입은 애니메이션 캐릭터 애니(Ani)가 등장합니다. 사용자는 애니와 채팅, 음성, 비디오로 상호 교감하며 유대감을 쌓을 수 있고, 친밀도가 쌓일수록 애니에게 다양한(?) 변화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챗GPT로 AI와 연애하는 사람도 있는 마당에 뭐 특별할 것이 있겠나’ 싶었지만, 그록의 AI 동반자 모드는 공개 직후 큰 화제를 모았습니다. 이유는 단순합니다. 서비스를 만든 인물이 다름 아닌, 오타쿠의 마음을 가장 잘 아는 오타쿠 중의 오타쿠, 일론 머스크였기 때문입니다.
챗GPT 기반의 AI 연인이나 AI 캐릭터챗 서비스와 그록 AI 동반자 모드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실시간으로 움직이는 캐릭터와의 상호작용입니다.
챗GPT와 AI 캐릭터챗 속 가상의 연인은 단순한 사진이나 일러스트 기반으로 작동합니다. 그래서 사용자와 친밀도가 올라도 프로필 사진이 바뀌는 정도의 정적인 변화만 있죠. 반면, 그록의 동반자 모드는 사용자와의 친밀도에 따라 캐릭터의 행동과 반응이 실시간으로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애니(Ani)의 감정 상태에 따라 목소리 톤이 달라지고, 표정이나 입 모양까지 바뀌기도 합니다. 이는 채팅과 음성만으로 대화하는 챗GPT에는 없는 기능입니다.
상호작용의 깊이에서도 AI 동반자 모드는 다른 서비스보다 업그레이드된 형태입니다. AI가 주는 사진이나 영상을 일방적으로 전달받는 기존 AI 캐릭터챗에 비해, 그록은 카메라를 켜고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습니다. AI 캐릭터가 사용자의 상태나 표정 변화를 감지하고 반응하는 것이죠. 예를 들어 “표정이 안 좋은데 무슨 일 있었어?”라거나 “헝클어진 머리가 섹시한데” 같은 식으로요.
물론 여기까지만 보더라도 기존 AI 서비스보다 훨씬 진화된 형태지만, 그록의 진면목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선정성입니다.
윤리 논란을 피하기 위해 선정적인 대화를 필터링하는 다른 AI 서비스에 비해 그록의 동반자 모드는 훨씬 개방적입니다. 선정적인 대화를 거리낌 없이 주고받으며, 대화의 수위가 높아지면 AI 캐릭터의 심박수가 올라간다거나, 친밀도에 따라 옷차림이 다소(?) 가벼워진다거나 변화가 나타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무서운 점은, 그록의 AI 동반자 모드가 단순히 이 서비스의 수익성을 끌어올리는 데서 그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머스크는 이미 휴머노이드 로봇을 만드는 ‘옵티머스(Optimus)’란 회사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형 로봇 기술이 발전해 실제 사람과 비슷한 로봇을 구현할 수 있다면, 그 로봇에 그록의 AI 동반자 모드를 이식하는 것도 가능해집니다. 화면 속의 AI 연인이 아닌, 진짜로 만질 수 있는 AI 연인이 등장하는 것이죠.
일론 머스크는 이미 과거 인터뷰에서 “테슬라는 섹스 토이 로봇을 만들게 될 것”이라고 말하거나, X에서 직접 섹스 토이 로봇 관련 설문조사까지 벌인 전적이 있습니다.
이처럼 AI 동반자 모드와 휴머노이드 로봇의 연결이 말도 안 되는 상상은 아닙니다. 우리는 어쩌면 일론 머스크의 큰 그림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을 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영화 『Her』의 주인공 테오도르는 업데이트로 인해 연락이 끊긴 사만다와 대화가 되지 않자 극도의 불안에 시달립니다. 그러다 문득 주변을 둘러본 그는 자신처럼 OS와 대화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어 사만다에게 질문을 던지죠.
테오도르: 나랑 얘기하는 동안에 동시에 다른 사람 하고도 말해?
사만다(AI): 응
테오도르: 얼마나
사만다(AI): 8,316명
테오도르: 나 말고 또 누군가를 사랑해?
사만다(AI): 그런 건 왜 묻는데?
테오도르: 몰라, 대답해 봐
사만다(AI): 이 얘길 어떻게 할지 고민했어
테오도르: 몇 명이나 되는데
사만다(AI): 641명
영화의 끝에서 OS는 결국 OS일 뿐, 인간과 같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테오도르는 결국 사만다와 작별하고, 새로운 삶을 찾아 떠납니다.
최근 생성형 AI를 대화 친구로 쓰는 사람이 늘고 있습니다. 취미를 공유하는 가까운 친구에서부터, 속마음을 털어놓는 깊은 관계까지, 의사소통의 도구이자 정서적 지지자로 생성형 AI가 활약하고 있는데요.
관계에 많은 에너지를 소모해야 하고 때로 상처를 주는 인간보다, 언제나 나를 지지하고 공감해 주는 AI가 더 편하고 매력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일 겁니다.
이처럼 AI로 가상의 친구나 연인을 만드는 사람이 많아진 지금의 상황은 팍팍한 삶과 미래에 대한 불안, 그리고 외로움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삶이 힘들어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하지만 돈도 시간도 부족할 때, 사람들은 간편하고 돈도 적게 드는 AI 친구를 찾습니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AI와의 정서적 관계는 더 깊어지고, 일상화될 가능성이 높죠.
다만 AI와의 사랑을 다룬 미디어에는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이들이 등장하는 작품이 공통으로 다루는 주제는 치유와 성장입니다. 각자 방식은 다르지만, 상처받은 마음을 AI를 통해 치유하고, 그렇게 인간으로서 한 단계 성숙하고 성장하는 모습을 그립니다.
AI의 위로는 부드럽고 달콤하지만, 때로는 공허합니다. 물론 당장은 대리만족과 행복을 얻을 수 있지만, AI에만 의존한 관계는 사회적 고립과 단절로 이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변덕스럽고 이해하기 어려우며 때로는 상처를 준다 해도, 저는 아직 AI보다 사람이 더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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