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과학고를 졸업하고 카이스트 전산학과에 입학해 창업을 꿈꾸는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병역특례로 군 복무를 마친 그는 안정적인 대기업 생활 대신 뜻이 맞는 친구들과 함께 2010년, 창업을 결심합니다. 회사의 이름은 ‘프로그램스’. 처음 출시한 서비스는 당시 유행하던 소셜커머스 쿠폰을 모아 보여주는 ‘쿠폰잇수다’였습니다.
하지만, 야심 차게 준비한 첫 서비스는 과도한 경쟁과 시장 포화, 소셜커머스 업종 자체가 사양세로 접어들며 경쟁력을 잃었습니다. 그렇게 결국 8개월 만에 서비스 종료 수순을 밟게 됩니다.
첫 실패 이후 그는 절치부심하여 다음 사업 아이템을 구상합니다. 창업 아이디어를 정리해 둔 엑셀 파일을 살펴보던 그는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하는데요. 모두 ‘개인화 추천 서비스’가 엮여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인터넷은 네이버를 비롯한 포털이 지배하고 있었고, 정보가 필요할 때는 포털에 검색어를 입력해 정보를 찾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는 이 지점에서 문제점을 발견했습니다.
“사람마다 관심사와 취향이 다른데, 포털과 온라인 서비스는 왜 모두에게 똑같은 정보만 제공할까? 나에게 맞는 맞춤 정보를 제공할 순 없을까?”
특히 그가 주목한 것은 영화였습니다. 당시 영화 추천은 커뮤니티나 블로그에 올라오는 개인의 후기와 평가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이런 영화를 재미있게 봤는데 비슷한 영화를 추천해 주세요” 같은 질문이 많았죠.
“그렇다면, 내 취향에 맞는 영화 추천 서비스를 만든다면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개인화 기반 영화 추천 서비스, 왓챠는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2012년 8월 첫 출시 이후, 왓챠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출시 1년 만에 네이버 영화 평점의 6배에 달하는 3,300만 개의 누적 평점을 확보하며, ‘영화 추천은 곧 왓챠’라는 공식을 만들어내는 데까지 성공했습니다.
스타트업이라는 개념조차 생소하던 시절, 작은 기업이 공룡 포털 네이버와의 경쟁에서 승리했다는 사실에 업계는 주목했는데요. 그렇게 카카오벤처스의 1호 투자기업 선정, 구글 영화 검색 결과에 왓챠 별점 데이터 제공, 일본 진출 등 거침없는 행보가 이어졌습니다. 당시 왓챠의 앞에는 밝은 미래만이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개인화 영화 추천 서비스 ‘왓챠’의 성공 이후 박태훈 대표는 드라마 카테고리 확장과 일본어 서비스 오픈 등 확장에 나섰지만, 큰 재미를 보지는 못했습니다. 새로운 성장 동력이 필요했던 왓챠는 다시 가장 큰 자산이자 경쟁력인 영화 평점 DB를 활용한 신규 서비스를 출시하며 수익화에 나서게 됩니다.
2015년 투자 유치를 하면서 투자자들이 'VOD 서비스 나중에 할 거라고 했는데 언제 할 거냐'고 물어봤죠. 그런데 그건 시작하는 데 비용이 많이 듭니다. 그때 왓챠피디아 이용자가 140만명 정도였어요. 300만~400만명 되면 그 때 VOD 서비스를 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투자자들이 우리가 투자를 해주겠다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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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초 가을에 개발을 시작해서 다섯 달 만에 왓챠를 개발했습니다. 왓챠를 시작할 때 디즈니, 소니, CJ, 롯데를 포함해서 메이저 CP사들도 다 기꺼이 계약을 해줬습니다. 이 정도면 시작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김주완 기자, OTT 공룡과 경쟁한 왓챠, 혹한기 이겨낸 비결은? [긱스], 한국경제, 2023년 12월 3일
2016년 1월, 왓챠는 콘텐츠 스트리밍 서비스 ‘왓챠플레이’를 출시하며 OTT 시장에 진출합니다.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 넷플릭스가 한국 진출을 선언해 왓챠플레이는 초기부터 글로벌 공룡 OTT와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는데요. 시장의 우려에도 왓챠플레이는 출시 첫해부터 의미 있는 성과를 냈습니다. 구글 플레이, 애플 앱스토어 선정 ‘올해의 앱’에 올랐으며, 앱스토어 매출 랭킹과 평균 체류 시간에서도 넷플릭스를 앞지르며 시장에 안착했습니다.
왓챠가 공룡 OTT인 넷플릭스와의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압도적인 콘텐츠 확보와 탁월한 큐레이션 역량이었습니다. 출시 초기, 40여 편의 한국 드라마와 영화만 보유한 넷플릭스에 비해, 2,000여 편 이상의 한국어 콘텐츠를 보유한 왓챠플레이는 현지화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그동안 갈고닦은 콘텐츠 큐레이션 능력이 더해지며 넷플릭스와의 초기 경쟁에서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출시 첫해 누적 가입자는 64만(왓챠플레이) vs 8만(넷플릭스). 네이버에 이어 글로벌 거대 OTT 기업인 넷플릭스와의 대결에서도 승리한 왓챠의 행보는 거칠 것이 없어 보였습니다. 2017년까지만 해도 말이죠.
글로벌 동영상 스트리밍의 절대 강자이자 거대 콘텐츠 기업 넷플릭스의 한국 진출에 업계는 긴장했지만, 예상과 달리 넷플릭스는 초반에 실망스러운 성적을 기록하며 찻잔 속의 태풍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저조한 실적에 체면을 구긴 넷플릭스는 강점인 오리지널 콘텐츠 투자에 적극 나서며 반격을 시도합니다.
2015년부터 2020년까지, 넷플릭스가 한국 시장에 투자한 금액은 약 7,700억 원이었습니다. 막강한 자본력을 앞세운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콘텐츠는 매년 글로벌 히트작을 배출했고, 2018년 20만 명에 불과했던 유료 가입자는 2020년 380만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넷플릭스의 폭발적인 성장에 위기를 느낀 글로벌 미디어 그룹이 시장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자체 OTT 서비스를 출시하며 반격에 나섰습니다. 2019년 디즈니 플러스, 2020년 HBO MAX가 등장했고, 국내에서도 2019년 옥수수와 푹이 합병하며 통합법인 웨이브가 출범했습니다. 이어 2020년에는 쿠팡플레이까지 런칭하며 OTT 서비스의 춘추전국시대가 시작되었죠.
잇따른 경쟁 서비스의 출시로 왓챠의 경쟁력은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왓챠에 콘텐츠를 공급하던 회사들이 자체 OTT를 선보이며, 왓챠에서 볼 수 있는 드라마와 영화가 점점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디즈니 플러스가 나오며 디즈니·픽사·마블의 영화를 더는 왓챠에서 볼 수 없게 되었고, 효자 콘텐츠였던 HBO 드라마 역시 HBO MAX의 국내 진출 움직임과 함께 사라졌습니다.
여기에 넷플릭스가 촉발한 오리지널 콘텐츠 경쟁이 더해지며 왓챠가 설 자리는 더욱 좁아졌습니다. 그렇게 OTT 서비스의 경쟁력이 오리지널 콘텐츠 확보와 자본 싸움으로 바뀌자, 큐레이션에 강점이 있지만 자체 IP가 없고 자본력이 부족한 왓챠의 입지는 크게 약화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왓챠 역시 투자금을 유치해 오리지널 콘텐츠 제작에 나섰지만, 연 매출이 수백억 원에 불과한 왓챠가 드라마 한 편에 수백억 원을 투자하는 넷플릭스·디즈니와 맞서기에는 역부족이었죠.
결국 전성기 129만 명에 달했던 유료 가입자는 40만 명 수준으로 쪼그라들며 실적이 크게 줄었습니다. 누적되는 적자와 콘텐츠 부족, 그리고 사용자 이탈이 겹치며 상황은 갈수록 어려워졌습니다.
왓챠는 강도 높은 구조조정과 VOD 판매, 숏드라마 제작 등 살아남으려 발버둥 쳤지만, 이미 기울어진 대세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유동부채 907억 원, 외부 감사 의견 거절이라는 위기 끝에 벼랑 끝으로 몰린 기업은 2025년 8월 4일, 200억 원을 투자했던 인라이트벤처스의 회생 신청으로 법정 관리에 돌입하게 됩니다.
망한 스타트업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경영 전략상 큰 오판을 저질렀거나, 방만한 경영으로 투자금을 마구 낭비했거나, 혹은 대규모 사용자 이탈을 불러올 만한 운영상의 실수를 저지른 경우가 대부분이죠. 하지만 지금까지의 행보를 살펴보면 왓챠는 이와는 다소 거리가 먼 행보를 보여왔습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다기보다는 조금씩, 서서히 무너져간다는 느낌이랄까요.
일부는 정치적 올바름(PC)에 대한 과도한 옹호나 성인 영화 산업 진출 등을 근거로 박태훈 대표를 비난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는 생존을 위한 몸부림에 가까웠을 뿐 회사를 무너뜨린 결정적 요인은 아니었습니다.
왓챠는 분명 독보적인 강점과 경쟁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특히 콘텐츠 확보와 개인화 큐레이션이 OTT 시장의 중심이던 시기에는 이 강점이 주효했습니다. 그러나 글로벌 미디어 그룹과 방송국이 시장에 뛰어들면서 경쟁 구도가 오리지널 콘텐츠와 자본력 중심으로 바뀌자 자본이 부족했던 왓챠는 시장에서 경쟁력을 잃어갔습니다.
사실 독보적인 IP를 가진 디즈니와 HBO조차도 넷플릭스의 아성을 완전히 넘지 못했습니다. 또한 지상파라는 강력한 뒷배를 가진 웨이브와 티빙조차 매년 수백억 원의 적자를 내는 것을 보면, 일개 스타트업에 불과한 왓챠가 수년간 시장에서 존재감을 보인 것만으로도 선방했다고 평가할 만합니다.
결국, 왓챠가 개인화 추천 플랫폼에서 OTT 서비스로 전환한 순간. 어쩌면 그때부터 미래는 이미 정해져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많은 자본이 드는 OTT 서비스를 시작하고, 적자를 감수하며, 외형 성장에 몰두해 자본에 의존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전도유망한 기술 스타트업은 자본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좀비 기업으로 변한 것입니다.
조금 느리더라도 작지만 단단하게, 도서와 음악 등으로 범위를 확장해 ‘종합 미디어 개인화 추천 서비스’로 성장했다면 왓챠의 지금 모습도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왓챠의 실패는, 적자를 감수하고서도 외형 성장과 규모의 경제만을 추구해 온 스타트업 씬에 던지는 씁쓸한 메시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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