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정한 예의가 없다면 누구도 성장할 수 없다
일을 하다 보면 두 가지 유형의 동료를 만날 수 있습니다.
한 명은 ‘천사 같은 동료’입니다. 슬랙 메시지에는 항상 웃는 이모티콘을 곁들이고, 사소한 부탁에도 “네! 그럼요! 도와드려야죠!”라며 흔쾌히 손을 내밉니다. 회의실에서는 온화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이고, 가끔은 본인 돈으로 산 간식을 돌리며 팀 분위기를 훈훈하게 만듭니다. 삭막한 프로젝트 속에서 한 줄기 빛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또 다른 한 명은 ‘실력주의자’입니다. 그는 하루가 멀다 하고 닥치는 마감 압박 속에서도 빠르게 문제를 해결해 나갑니다. 팀장님이 “저 친구가 있어 프로젝트가 굴러간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때로 그 이면에는 우리를 힘들게 하는 모습이 섞이기도 합니다. 천사 같던 동료는 맥락 없는 질문으로 업무를 방해하고, 문제를 일으키고도 수습하지 못해 답답함을 줍니다. 반면 실력주의자 동료는 ‘잘하면 그만’이라는 태도로 일관합니다. 자기와 다른 의견에는 한숨을 쉬거나, 동료를 무시하는 독불장군 같은 모습을 보이곤 합니다.
이런 경험이 쌓이다 보면, 그들에 대한 판단이 왔다 갔다 합니다. 처음에는 천사 같은 동료가 낫다고 생각하다가도, 차라리 성격이 까칠하더라도 실력이 있는 편이 낫다 싶기도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어느 쪽이 낫다고 느꼈나요?
멀리 보고 성장하는 회사라면, 사실 두 사람 모두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시작부터 질문이 잘못되었다는 뜻입니다. 마치 “엔진이 없지만 멋진 자동차”와 “외관은 엉망이지만 강력한 엔진을 가진 자동차” 중 하나를 고르라는 것과 다르지 않죠. 둘 다 온전한 자동차가 될 수 없듯, 두 유형의 동료 모두 좋은 팀원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결국 이 문제의 본질은 ‘예의’에 대한 잘못된 정의에 있습니다. 우리가 주로 생각하는 예의는 ‘상냥한 말투’나 ‘친절한 태도’지만, 업무에서의 예의는 다릅니다. 이 글에서는 표면적인 예의가 아닌 일에 있어 진정한 예의가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합니다.
‘답답하지만 착한 동료’가 팀에 끼치는 문제는 바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초기에는 그들의 친절함이 긍정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을 잘 들여다 보면 그 착함이 날카로운 무기가 되어 팀을 병들게 하는 상황을 볼 수도 있습니다.
이들의 행동은 악의에서 비롯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대라고 할 수 있죠. 문제를 만드는 행동은 좋은 사람으로 남고 싶은 욕구와 갈등에 대한 극도의 두려움이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마음에서 출발합니다.
이러한 내면의 목소리는 그들로 하여금 ‘정확함’보다 ‘안전함’을 선택하게 만듭니다. 즉, 자신의 의견을 피력해 생길 아주 작은 심리적 불편함을, 팀 전체가 감당해야 할 프로젝트의 거대한 리스크를 맞바꾸는 것입니다. 결국 이는 동료애나 책임감에서 비롯된 착함이 아니라 팀의 성공보다 자신의 감정적 안정을 우선시하는 이기적인 선택에 가깝습니다. 미움받을 용기가 없는 전문가의 선의는 때로 무능보다 더 위험할 수 있습니다.
이들의 심리적 문제는 곧 팀 전체의 물리적인 시간 손실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주로 발생하는 상황 두 가지를 예시로 준비해 보았습니다.
상황 1: “다시 물어보기가 무서워요”
기획자가 신규 기능의 상세 정책을 설계하다 개발자에게 “이용자가 A를 할 때 B가 가능한가요?”라고 물었습니다. 개발자는 하던 일을 멈추고 친절하게 이를 설명했습니다. 며칠 뒤, 기획자는 비슷한 문제에 부딪히지만, 당시 개발자의 설명이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다시 물어볼까 고민하던 그는 또 같은 질문을 하면 꼼꼼하지 못한 사람으로 보일까 걱정해 지레짐작으로 설계를 진행합니다.
결국 잘못된 정책으로 배포 이후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그로 인한 피해와 함께 기획서 재작성, 코드 수정이라는 값비싼 비용을 팀 전체가 치르게 됩니다.
상황 2: “고객 의견은 다 맞춰야 해요”
이런 기획자는 더 큰 문제를 만듭니다. 중요 고객사와의 최종 리뷰 회의에서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는 듯 보였습니다. 만족한 고객사 담당자가 웃으며 말합니다.
“훌륭하네요. 그런데, 혹시 여기 소셜 로그인 기능 하나만 간단하게 추가할 수 있을까요? 다음 주 캠페인에 꼭 필요해서요. 간단한 기능 맞죠?”
기획자는 기능 추가에 2주는 걸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고객과의 관계를 해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곧 “네, 내부적으로 빠르게 진행해 보겠습니다”라는 애매한 답을 남깁니다. 결국 다음 프로젝트를 준비하던 개발팀과 QA팀은 갑작스러운 요구사항에 야근과 주말 근무를 합니다. 게다가 촉박한 일정에 맞춰 기능을 구현하다 보니 버그가 발생했고, 그 버그로 캠페인 오픈 직후 장애가 터지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합니다.
단순히 고객의 기분을 맞추려던 표면적 예의가 팀 전체의 신뢰도 저하, 수많은 밤샘 근무, 허공에 날아간 안정성을 만들어 낸 거죠.
이들이 가져오는 가장 치명적인 손실은 기회비용입니다. 눈에 보이는 손실이 아니라 얻을 수 있었지만 이제는 영영 사라진 미래입니다.
새로운 서비스를 위한 브레인스토밍 회의에서, 모두가 아이디어 하나에 열광하고 있습니다. 어느 팀원은 그 아이디어의 치명적인 약점을 찾고 곧 더 나은 대안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다들 이렇게 좋아하는데 괜히 찬물을 끼얹는 건 아닐까?’, ‘내 아이디어가 너무 뜬구름 잡는 소리는 아닐까?’라는 생각에 말을 꺼내지 않습니다. 이로써 팀이 실패하지 않을 미래나 더 큰 성공의 가능성 일부가 사라집니다.
만약 몇 달이 지나 실제 문제가 드러나 프로젝트 전체가 실패했다면, 그 침묵은 단순한 소극적 태도가 아닌 방관자의 책임으로 바뀔 뿐입니다. 이처럼 프로덕트의 성공 가능성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는 그 어떤 상냥한 말투로도 용서받기 어려운 무례입니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답답하지만 착한 동료’의 행동들은 열심히 일하는 동료와 팀의 미래에 대한 예의가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서 만난 ‘답답하지만 착한 동료’로 인해 지친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곤 합니다.
‘차라리 성격이 나빠도, 일 잘하는 사람이 낫겠다.’
하지만 답답한 사람들보다도 팀을 혼란에 빠뜨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실력이라는 방패로 무례함을 숨기는 사람입니다. 이들은 명확한 성과를 내기 때문에 팀에 필수적인 존재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무례함이 만들어내는 균열은 조용히, 그리고 깊은 곳부터 시작해 팀을 썩게 만듭니다.
이들의 무례함이 용납되는 이유는 단 하나, 성과가 눈에 잘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빠르게 버그를 잡아내고, 복잡한 기능을 구현합니다. 리더 입장에서는 이처럼 가시적인 결과물을 무시하기 어렵습니다.
“김XX 님이 좀 까칠하긴 해도, 지난 분기 서버 안정화는 혼자 다 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 팀에 저 사람 빠지면 큰일 납니다.”
이러한 인식은 성과라는 단단한 방패를 만들어, 그의 무례한 언행을 모두 정당화합니다. 하지만 이는 팀원들에게 ‘성과만 좋다면, 다른 모든 것은 용서될 수 있다’ 라는 매우 위험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상황이 이어진다면, 팀에서 존중과 협력은 사라지고, 개인의 역량만을 중시하는 왜곡된 문화가 만들어집니다.
큰 문제를 해결하는 팀은 결코 혼자 모든 걸 해낼 수 없습니다. 기획자, 디자이너, 개발자가 각기 다른 역할을 맡아 서로 다른 관점에서 깊이 고민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고민들을 연결해 주는 핵심 매개체는 소통입니다.
그러나 무례한 동료는 비판적인 언어와 무시하는 태도로, 동료들의 소통 의지를 꺾어버립니다.
함께 일하던 주니어 디자이너는 혁신적인 UI 아이디어를 떠올렸지만, “현실성 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라는 말을 듣고 더는 시도를 하지 않습니다. 팀의 기획자는 서비스 방향을 바꿀 만큼 중요한 데이터를 발견했지만, 이전 회의에서 의견이 무시당했던 기억으로 입을 닫습니다.
무엇보다 이러한 사람들은 복잡한 문제를 해결해도 그 과정을 제대로 공유하지 않습니다. 결국 그 지식은 팀의 자산이 아닌 개인의 전유물로 남습니다. 만약 그가 휴가를 떠난 사이 비슷한 문제가 발생한다면, 팀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것입니다. 이처럼 무례한 태도는 단순히 소통의 어려움을 넘어, 동료들의 입을 막고, 팀의 집단지성을 마비시켜 버립니다.
물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 한 명이 결국 일을 잘하면, 문제없는 것 아닌가?’
안타깝게도, 그가 만든 모든 성과가 그 사람의 천재성을 입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지금까지 풀어온 문제들이 “그가 혼자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의 문제”였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업무를 하다 보면 회사와 개인이 성장하는 과정에 반드시 ‘혼자서는 절대 넘을 수 없는 벽’이 나타나고는 합니다. 벽은 한 사람이 쌓은 지식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의 기술적 난제의 모습일 수도 있고, 여러 부서의 협력을 끌어내야 하는 대규모 프로젝트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그 벽 앞에서,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더 뛰어난 실력이 아니라 동료들의 신뢰와 선의입니다. 하지만 무례한 태도로 동료와의 신뢰를 모두 파괴해 버린 사람은, 그의 날카로운 말에 상처받은 동료들로부터 더 이상 시간과 노력을 투자받지 못할 것입니다.
결국 그는 스스로 쌓아 올린 실력이라는 감옥에 갇혀 성장의 벽을 넘지 못할 것입니다. 가능성을 스스로 가둬버린 태도가 만든 어리석고 비극적인 결말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두 유형의 동료가 결국 팀을 실패로 이끈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딜레마를 해결할 방법은 정말 없는 걸까요?
이를 해결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예의’의 정의를 바로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그 의미를 다시 배워야 합니다.
업무에서의 진정한 예의란 단순히 상냥한 말투나 공손한 태도가 전부는 아닙니다. 진짜 예의는 ‘공동의 목표’와 ‘함께하는 동료’를 동시에 존중하는 프로페셔널한 전문가의 태도에서 나옵니다. 지금부터 진정한 예의를 지닌 사람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우선 필요한 것은 목표에 대한 존중입니다. 이는 우리가 함께 만드는 프로덕트와 서비스를 향한 예의로, 단순히 맡은 일을 해내는 것을 넘어,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답답하지만 착한 동료에게 필요한 존중의 영역입니다.
그 다음, 동료에 대한 존중은 함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동료들을 향한 예의입니다. 이는 단순히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는 차원을 넘어, 동료를 함께 성장하는 전문가로 인정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성격 나쁘지만 잘하는 동료들이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입니다.
이처럼 목표에 대한 존중과 동료에 대한 존중은 결코 충돌하지 않습니다.
동료의 성장을 돕지 않고는 최고의 목표를 달성할 수 없으며, 목표를 무시하고는 동료를 진정으로 존중한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진정한 예의는 이 두 가지 존중이 완벽하게 균형을 이룰 때 완성됩니다.
착하기만 하거나, 잘하기만 하는 것으로도 어느 정도 경쟁력은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높은 곳을 향해 성장하려면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성장이란 더 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여러 사람과 소통하지 않고는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AI로 변화하는 시대에도 사람 사이 소통은 반드시 필요하며, 오히려 더 중요해질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예의는 점점 더 중요한 역량이 되겠죠.
서로의 시간을 존중하고, 함께 만드는 프로덕트의 가치를 높여 나갑시다. 서로의 성장을 진심으로 돕는 태도야말로 미래의 인재가 갖추어야 할 핵심 역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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