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정말로 “ERP”란 뭔가요?
ERP(Enterprise Resource Planning).
저는 10년 넘게 ERP를 써왔습니다. 컨설턴트로, 때로는 경영 분석가로 일하면서 ERP에 대한 이해도가 상당히 높은 편이라고 자부합니다. 그럼에도 가끔씩 누군가로부터 “그래서 ERP가 뭐예요?”라는 질문을 받으면 멈칫하고는 합니다.
누군가는 ERP를 두고 거창하게 “기업 경영의 중추(Backbone)입니다”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다른 이는 회계 시스템, 영업/물류 관리 시스템, MRP(Material Requirements Planning), 혹은 그룹웨어 시스템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다가온 AI 시대에도 정제된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축적하고 관리하는 ERP의 중요성은 줄어들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ERP라는 키워드를 검색하면 나오는 거대한 정의, 그리고 ERP 벤더(공급업체)와 파트너사들이 제공하는 광고와 복잡한 설명은 진입장벽을 높이는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10년 동안 사용자로 쌓아온 ERP의 개념과 소프트웨어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관련 주제들을 자세히 다뤄보려고 합니다. 기업 규모와 산업을 불문하고 ERP의 개념을 알아두는 것은 중요합니다. 일반 사용자를 비롯해 경영 컨설턴트나 분석가, 나아가 민감한 의사결정이 필요한 경영진 모두 유용한 정보를 얻어가면 좋겠습니다.

미리보기
- 뻔한 개념 정의 말고, 그래서 정말로 ‘ERP’는 뭡니까?
- ‘ERP를 사용한다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
- 우리나라에서 ERP는 어떻게 발전해 왔나?
- ERP 벤더별 시장 점유율과 반응은? SAP vs. 오라클 vs. 더존
- 비싸거나 폐쇄적이거나. 국내 ERP에는 대안이 없을까?
뻔한 개념 정의 말고, 그래서 정말로 ‘ERP’는 뭡니까?
재미없다고 느끼겠지만, 대표적인 ERP의 정의를 먼저 살펴봅시다.
“ERP는 전사적 자원 관리(Enterprise Resource Planning)의 약자로, 기업 내 다양한 부서의 업무 프로세스를 통합 관리하는 시스템을 의미합니다. ERP 시스템은 재무, 회계, 인사, 생산, 물류 등 기업의 전반적인 활동을 하나의 시스템에서 관리하여 효율성을 높이고 데이터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이 지루한 문장을 단순하면서도 간단한 문장으로, 다시 정의해보겠습니다.
“ERP는 우리 회사의 각 기능(영업, 물류, 생산, 관리, 재무 등)이 협업하는 ‘규칙’입니다.”
협업하는 규칙. 마치 노션(Notion)이나 슬랙(Slack) 같은 협업툴이 떠오르기에 친숙하고 직관적이지 않나요? 이처럼 ERP의 본질은 강력한 자동화, 계획, 통제 및 시뮬레이션 기능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일을 할 수 있게 규칙에 따라 제대로 데이터를 모으자!’라는 선언에 가깝죠.
수많은 예시가 있는데요, 아마 가장 많은 분이 사용해 보았을 ‘E-Accounting’을 예시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회사에서 업무를 하다 보면 반드시 지출이 수반됩니다. 그렇다고 임의로 회삿돈을 쓸 수는 없으니 결정권자의 승인을 받아야 합니다. 또, 계획 없는 지출은 승인해달라고 할 수도 없죠. 예산이 편성된 항목을 특정하고, 근거도 첨부해야 합니다. 이런 과정을 온라인 또는 전자적으로 처리하는 시스템을 ‘E-Accounting’ 시스템이라고 하고요.
이 시스템은 ERP일까요? 네, ERP입니다. 비용을 사용하는 부서(기능)와 이를 검토하고 집행하는 회계/관리 부서 간의 ‘규칙’이니까요.
‘ERP를 사용한다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
ERP를 사용하는 모습을 보기에 앞서, 새롭게 정의한 ERP에서 제외되는 이해관계자를 알아야 합니다. 바로 결재권자, 같은 팀(기능 조직)의 동료, 그리고 경영 분석가입니다. 예시로 알아보겠습니다.
우리가 휴대폰 통신사 고객센터의 고객 서비스(C/S)를 담당하고 있는 직원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고객이 일정 문제로 이번 달 요금을 면제해달라고 컴플레인을 걸었네요. 우리는 팀장님에게 면제 승인을 요청하고, 빌링팀에 요금 면제 내역을 전달합니다. 여기서 크게 두 번의 정보 흐름이 발생합니다. ‘요금 면제 승인 요청’과 ‘요금 면제 적용 요청’이죠. 하지만, 이 예시에서 ‘요금 면제’를 승인하는 결재권자는 ERP 이해관계자에서 제외합니다. ‘전자결재 및 승인’ 기능 영역까지 포함한 모든 소프트웨어가 ERP로 인식되는 것을 막기 위함입니다.
다음 예시는 ‘같은 팀 동료’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C/S 업무 5건을 처리하기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급하게 연차를 사용할 일이 생겨 같은 팀 동료가 이 업무를 대신 처리했다고 합니다. 이때 일을 처리해 준 동료 또한 ERP의 이해관계자로 보지 않습니다. ‘프로젝트와 작업(Task) 관리’ 영역도 모든 소프트웨어를 ERP와 분류하는 주요 기능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은 ‘경영 분석가’ 및 ‘정보 소비자’입니다. 경영관리팀이나 데이터 분석팀, 경영진과 리더들이 주로 이에 해당합니다. 이들은 요약된 텍스트와 시각적 자료를 활용해 보고서를 작성하거나 봅니다. 이들 역시 ERP의 범위와 이해관계자에서 제외하겠습니다. ‘BI/DW(Business Intelligence & Data Warehouse)’ 영역까지 포함하면 대부분의 소프트웨어가 ERP로 간주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제외하면 무엇이 남느냐고요? 결재 라인, 작업 및 문서 관리, BI/DW를 제외하고 남는 것은 순수한 기능과 조직 간의 업무 프로세스입니다. 따라서 ERP를 사용하는 모습은 굉장히 단순합니다. 정보를 입력하는 화면, 그리고 유효성을 점검(Validation)하는 규칙이 핵심이죠.
모든 프로세스를 나열하기보다는, 대표적인 기업 프로세스 흐름인 O2C(주문부터 결제까지, Order to Cash)만 구체적인 예시로 살펴보겠습니다.
O2C 주요 프로세스 흐름: 쿠팡 이커머스 예시
- 시작: 고객이 앱에서 상품을 선택하고 주문합니다.
- 흐름 1: 고객이 상품, 혜택, 배송, 결제 정보를 입력하면 주문이 요청됩니다.
- 흐름 2: 시스템에 의해 주문 요청 즉시 출하 지시가 떨어지고 최적의 물류센터가 결정됩니다.
- 흐름 3: 물류 센터에서 재고를 가져오고(Picking), 포장하고(Packing), 적재 및 운송합니다.
- 흐름 4: 결제는 미리 이루어졌고, 배송 완료 이후 구매 확정 혹은 반품이 진행됩니다.
- 흐름 5: 구매가 확정된 상품은 매출과 원가로 집계되고 회계 결산 및 조정을 거칩니다.
쿠팡의 ERP, 즉, 각 기능이 협업하는 규칙이 보이시나요?
사실 눈에는 잘 안 보일 겁니다. 모든 프로세스는 시스템을 통해 이루어져서, 사용자는 단순히 상품을 분류하고 바코드를 찍는 행위만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ERP가 잘 구현되었다는 것은 ‘규칙’이 명확하고 시스템에 잘 녹아있다는 뜻입니다. 담당자는 바코드만 찍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ERP에 정보를 입력하고 업데이트하는 행위를 맡습니다.
반면, ERP가 제대로 구현되지 않은 회사는 어떨까요?
똑같이 주문을 받아도 영업관리팀에서 실제 재고가 있는지 수기로 확인하고, 물류팀에서 어느 창고의 상품을 출하시킬지 하나씩 판단해 배차 대상을 지정합니다. 곧이어 배송이 끝나면 하나씩 출하 기록을 업데이트하고요.
혹시 이런 생각이 들지 않나요? ‘아, ERP라는 게 생각보다 별 게 아니구나. 사실 우리는 이미 비슷하게 일을 처리하고 있고, 100% 자동화 안 해도 사람이 다 할 수 있는데? 꼭 도입할 필요는 없겠네.’ 네, 맞습니다. 사실 엑셀 같은 스프레드시트도 입력과 규칙이 표준화되어 있으면 ERP라고 볼 수 있죠. 굳이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실상 회사의 모든 사람이 ERP 사용자이고, 거의 모든 소프트웨어가 ERP 같은데, 왜 정작 떠오르는 건 SAP, 더존, 오라클, Odoo와 같은 특정 소프트웨어일까요? 왜 대기업이나 중견기업의 미궁 같고 칙칙한 SAP, 오라클 화면이 떠오르고, 중소기업 회계팀과 인사팀에서만 쓰는 더존 같은 프로그램이야말로 ERP라는 생각이 들까요?
그 이유는 대부분의 ERP 프로그램이 ‘각 기능이 협업하는 규칙’이라는 범위를 넘어, 확보된 데이터를 기초로 업무를 자동화하는 기능까지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ERP에는 수 천, 수 만가지 자동화 기능이 포함되어 있는데요, 대부분의 회사는 이 중 10% 이상을 사용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패키지 소프트웨어니까 이 기능에 대한 비용도 전부 부담해야 합니다. 그래서 라이센스 비용이 비싸죠.
왜 ERP 프로그램에 ‘협업하는 규칙’이라는 가볍고 직관적인 범위를 넘어 미처 사용하지도 못할 많은 기능이 포함될 수밖에 없었을까요? 현재의 ERP에 대한 모습과 인식이 왜 이렇게 자리 잡았는지 설명하려면, 우리나라 ERP의 주요 역사를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ERP는 어떻게 발전해 왔나?
ERP 태동기: 세계
먼저 ERP라는 용어의 시작점은 어디인지 쫓아가 봅시다. 많은 분이 ERP라는 용어가 글로벌 톱 리서치/컨설팅펌인 가트너(Gartner)가 1990년대에 정의하면서 시작되었다고 알고 있을 텐데요, 사실 그 진짜 시작을 알기 위해 조금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려고 합니다. 우리는 1940년대로 갑니다.
1945년, 독일의 항복에 이은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와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은 연합국의 승리로 종결되었습니다. 이 역사의 한 장면은 여러 측면에서 의미가 있지만, 경제적 관점에서 보면 이후 미국이 전 세계 패권을 주도하게 된 시작이기도 합니다.
강력한 미군의 군수와 운영관리(Operation Management) 역량은 민간 분야로 급속히 퍼졌고, 그에 따라 대량생산, 표준화, 물류(Logistics), Push 기반 생산방식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했습니다.
그렇게 1956년 컨테이너 해운 운항 시작과 1959년 메인프레임 컴퓨터의 상용화 같은 주요 사건을 거쳐 통칭 ‘MRP I’(Material Requirements Planning), 즉 자재 소요량 계획을 효율적으로 자동화하는 소프트웨어가 등장합니다.
1970년대에서 1980년대로 넘어오면서는 IBM의 작고 저렴한 하드웨어, 오라클의 상용 관계형(Relational) DBMS, 그리고 이더넷(Ethernet)과 PC가 나타났습니다. 이제 자재뿐 아니라 설비, 인력, 재무를 통합적으로 관리하는 ‘MRP II(Manufacturing Resource Planning)’로의 발전은 자연스러운 흐름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ERP라는 용어는 가트너에 의해 정의되었다기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제조업이 중요해지고 메인프레임이 확산되면서 부각된 MRP, 그리고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네트워크의 발전이 맞물려 확장된 개념으로 보는 것이 알맞습니다. 여기까지 정리하면 굵직한 글로벌 수준의 이벤트는 짚어본 겁니다.
ERP 태동기: 국내
자, 그럼 우리나라의 ERP 역사로 돌아와 볼까요? 우리나라는 1945년 해방 이후, 1960년대부터 이른바 ‘한강의 기적’을 이루며 급격한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이에 맞춰 정부와 대기업 전산실에 IBM 메인프레임이 도입되며 전산화가 시작됐고, 1970년대에는 수출 100억 달러 돌파와 중화학공업(HCI) 육성 정책 실행으로 삼성과 현대 공장에 MRP I이 시험적으로 운영되었습니다. 세계 흐름에 맞춰 1980년대에는 오라클 RDB를 활용한 MRP II 프로젝트가 활성화되었습니다.
우리나라 ERP 시장의 본격적인 변곡점은 1990년대에 발생합니다. (1994년 국내 최초의 PC방 등장 같은 이벤트와 함께) 1995년, 삼성그룹이 삼성전자부터 시작해 ‘SAP R/3 시스템을 도입하겠다’라는 중요한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국내에서 ERP라는 용어가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은 이때라고 봐야겠죠.
삼성전자는 한때 KOSPI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27.8%에 달했던 기업입니다. 국내 1위 SAP의 시장점유율은 20% 수준으로 현재 시점 삼성전자의 KOSPI 비중과 유사해 보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ERP에 대한 잘못된 인식 중 하나의 출처가 드러납니다. ‘대기업 ERP는 SAP 아닌가?’라는 인식은 삼성전자가 SAP를 사용하기에 생겼다고 봐도 좋다는 것입니다. (벤더에 대한 인식과 특성은 다음 글에서 더 자세히 다뤄보겠습니다)
1990년대 후반은 국산 ERP의 태동기입니다. 영림원소프트랩이 1997년 국산 ERP ‘K-System’을 발표하며 포문을 열었고, 1999년에 이카운트 ERP, 2000년에 더존비즈온의 ERP M이 출시됩니다. 특히 1997년의 외환위기(IMF)가 불러온 기업 투명성 제고와 시장 개방을 포함한 구조조정 등으로 ERP 수요는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이렇게 2000년대(Y2K)에 도달한 우리나라는 수많은 전산화가 이뤄진 듯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에도 삼성그룹을 제외한 대부분의 기업들은 이제 막 걸음을 뗄까 말까 고민하는 단계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ERP 확산기: 혁신적인 변화의 실종
지금까지, ERP의 역사는 기술 동향과 경영 환경 변화와 밀접하게 이어진다는 점이 눈에 띄셨을 겁니다. 다만 이런 태동기를 지나 2000년부터 2019년 Covid-19 팬데믹 전까지는 눈에 띄는 큰 변화가 없었던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중요한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2002년 미국 엔론(Enron)과 월드컴(WorldCom)의 초대형 회계 부정 사건을 계기로 SoX(Sarbanes-Oxley Act)라는 강력한 규제가 제정되었고, 2007년 아이폰(iPhone)의 등장으로 스마트폰 생태계가 열렸으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발했습니다. 국내에서는 2015년 대우조선해양 분식회계 사건에 따른 신(新)외부감사법 제정도 있었죠.
기술과 소프트웨어 측면에서는 HR 중심의 ERP 워크데이(Workday)가 2012년 IPO(기업공개)를 했고, 2014년에는 오픈소스 ERP Odoo(오두)가 리브랜딩하며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100% 오픈소스와 파이썬 기반 구조 등 비싼 라이선스 비용과 특정 벤더 종속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었고요. 또한, 2016년 오라클(Oracle)은 넷스위트(NetSuite)를 인수하며 SMB 시장을 공략했고, 마이크로소프트(Microsoft) 역시 같은 해 ‘다이나믹 365’를 출시했습니다. 인포(Infor) ERP는 2014년부터 AWS 기반 클라우드스위트(CloudSuite) 제품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의 ERP는 점진적으로 발전했습니다. 다만 다품종 소량생산의 시대로 넘어가면서 이전과 같은 혁신적 매출 성장이나 생산성 향상은 기대하기 어려웠습니다. 따라서 ERP 프로젝트는 점점 TCO(총소유비용, Total Cost of Ownership)와 ROI(투자 대비 수익률, Return on Investment)를 면밀히 검증하는 것이 중요해졌고, 컨설팅펌과 SI 기업들이 BPR(원점에서의 프로세스 구축, Business Process Reengineering), ISP(정보화 전략, Information Strategy Planning), PI(프로세스 혁신, Process Innovation) 등 프로젝트를 표준화하며 ERP 시장의 지속 성장에 기여했습니다.
느슨해진 ERP 시장에 긴장감을 준 Covid-19와 클라우드 경제
사실 클라우드 열풍은 Covid-19 전부터 이미 시작됐습니다. 물론 구글과 MS를 빼놓을 수는 없겠지만, 클라우드 시대의 주인공은 역시 AWS(Amazon Web Services)로 봐야겠죠. AWS를 필두로 2010년 초에 시장은 클라우드 경제를 충분히 증명했고, 2017년 즈음부터 SAP, 오라클 등 ERP 벤더도 제품을 상용 클라우드에 올려 판매하는 데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잠깐, 왜 ERP 얘기를 하다가 클라우드로 주제가 넘어갈까요? 간단하게 말하자면, 클라우드가 ‘비싼데 + 종속되는’ 기존 ERP 도입 방식을 크게 바꾸고 있기 때문입니다.
전통 ERP 도입 방식의 한계
전통적인 ERP 도입 방식은 서버를 준비하고 모듈과 사용자별로 라이센스를 구매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라이센스 비용의 15~20% 정도는 매년 유지보수와 기술 지원 비용으로 납부합니다.조금 구체적인 숫자로 예를 들어볼까요? 매출액 5천억 원~1조 원, 직원 수 500~1천 명인 중견 제조 기업을 기준으로 본다면, 일회성 비용으로 40~50억 원, 연간 유지보수 비용으로 5~8억 원을 책정하면 적절합니다.
다만 ERP 벤더사에 따라 TCO(총 소유 비용)는 70% 이상 줄일 수도 있는데요, 어떤 벤더사든 시장에서 빈번하게 수주를 이뤄내는 것을 보면 성과와 비용 사이에 팽팽한 상충 관계(Trade-off)가 있다고 보입니다. 금액의 이점으로 특정 벤더사를 선정했다가 몇 년 후에 재구축하는 경우도 있고, 실제 활용 기능 대비 너무 과한 기능을 제공할 벤더사를 선정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클라우드가 가져온 혁신
하여튼 ERP는 초기 도입 비용도 높고, 한 번 도입하면 종속성도 큽니다. 따라서 고객 입장에서는 진입장벽이 높았죠.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클라우드 경제’가 활성화되었습니다.
AWS는 물리적인 인프라 설치 없이 온라인으로 합리적인 가격에 하드웨어 인프라를 제공하며 혁신을 이뤘습니다. 물리적 소유 대신, 마치 구독형 서비스처럼 ‘사용한 만큼 지불하는(Pay-as-you-go)’ 방식이 가능해진 것이죠.
이는 자연스럽게 소프트웨어를 구독형 서비스(SaaS, Software-as-a-Service) 형태로 제공하는 트렌드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초기 클라우드 확산 시기에 ERP 벤더들이 받은 영향은 크지 않았다고 봐요. 고객의 진입장벽을 낮추기 위해 물리적 인프라 대신 온라인에서 클라우드로 ERP 인프라를 관리할 수 있다고 소구하는 수준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Covid-19 팬데믹과 디지털 전환 붐
2020년, Covid-19 팬데믹이 본격화됩니다. 물론 경제와 민생에도 큰 충격이었지만, 이 사건 이후 전 세계에 ‘디지털 전환’이라는 새로운 붐이 찾아왔습니다. 정부는 경색된 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해 유동성 정책을 시행했고, 비대면의 제약을 해소하고자 IT 기술의 중요성이 부각되었습니다.
ERP 시장은 어땠을까요? 비싸고 종속적인 구조를 가진 특징으로 위기감을 느꼈을 겁니다. 일종의 대장주인 ERP 벤더 SAP의 매출은 2019년 308억 달러에서 2020년 317억 달러(전년 대비 +3.0%), 2021년 323억 달러(+1.9%)를 기록한 다음, 2022년에 314억 달러(-2.8%)로 역성장했습니다. 금융위기 시기를 제외하고 SAP의 첫 역성장이었죠.
그렇다면 이런 팬데믹 환경이 모든 소프트웨어 시장이 부정적이었을까요? CRM(Customer Relationship Managment) 소프트웨어 시장을 대표하는 Salesforce(세일즈포스)의 매출은 2019년 133억 달러에서 2020년 171억 달러(+28.6%), 2021년 212억 달러(+24.0%), 2022년은 265억 달러(+25.0%)로 폭풍 성장했습니다.

소프트웨어의 특성이 달라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요? 물론 표준화 대량생산에서 맞춤형 개인화로 산업이 넘어가며, CRM 소프트웨어가 부상한 영향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차이는 세일즈포스가 1999년 창립부터 철저히 ‘클라우드 Only’ 전략을 유지해 온 기업이라는 점입니다.
ERP가 높은 초기 비용과 긴 계약 기간으로 종속성을 가졌다면, 세일즈포스는 초기 비용이 낮습니다. 게다가 데모와 무료 체험 기간, 혹은 1년 약정 기간이 지나기 전이라도 계약을 해지하고 다른 소프트웨어를 도입할 수 있습니다. 이에 SAP 역시 클라우드 중심 전략으로 전환했고, 2023년과 2024년 다시 각각 7.8%, 8.5%의 성장률을 기록하며 회복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물론 생성형 AI의 영향도 클 것입니다.)
무겁고 거대한 소프트웨어의 굴레를 벗어난 ERP
Covid-19로 대변되는 2020년부터 2023년까지, 디지털 전환과 클라우드 경제 확산 시대를 지난 ERP 시장의 가장 큰 변화는 무엇일까요? 대형 벤더들이 클라우드에 최적화하고 초기 비용을 낮췄다는 점? 접근성을 큰 폭으로 높였지만, 혁신이라고는 보기 어렵습니다.
저는 이 시기를 “ERP가 드디어 무겁고 거대한 소프트웨어의 굴레를 벗어난 시기”라는 정의하고 싶습니다. 이제 우리 회사의 ERP는 SAP다, 혹은 더존이다처럼 특정 벤더로만 묶어둘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모두 사용한 만큼 지불하는 작은 단위의 클라우드 서비스로 쪼개졌기에, 더는 하나의 거대한 소프트웨어에 종속될 필요가 없어진 것이죠.
그렇게 “ERP는 뭐 쓰세요?”라는 질문에 “SAP나 더존을 씁니다”가 아닌 “재무 모듈은 ‘SAP Finance’를 사용하고, 세무 신고는 ‘더존’, 인사 및 급여관리는 ‘Flex’를 씁니다”라고 대답하는 시대가 온 것입니다.
물론 기업이 다양한 SaaS를 동시에 사용하면서, 통합 관리가 어려워지고 기능을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는 사례도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일부러 하나의 큰 소프트웨어에 종속되기를 선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문제가 대형 소프트웨어 벤더에게 높은 비용을 지불한다고 반드시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통합 관리라는 명분 아래, 더 전문적이고 유연하며 가격 경쟁력까지 있는 다른 대안을 마련할 수 없고, 우리만 쓰려고 자체 구축한 기능과 서비스가 점차 낙후되어 실행력이 떨어지기도 합니다.
결국 지금처럼 ERP의 개념적 범위가 확장되며 업무 프로세스를 표준화하고 효율화할 수 있다는 점은 미래를 기대하게 합니다. 실제 업무 방식, 속도, 품질에 큰 변화가 생기니까요.
마치며
슬슬 변곡점이 오고 있습니다. (이미 온 것 같기도 합니다.)
ERP를 포함해서 프로세스를 통합하고 자동화하는 소프트웨어의 비용이 너무 낮아진 것입니다. 필요한 소프트웨어를 조합해서 잘 쓰는 것만으로도, ROI(Return on Investment)가 즉각적으로 보입니다. 다른 회사는 다 개인용 PC로 일하고 있는데, 우리만 종이문서와 결재판으로 일하고 있다? 생산성의 차이가 어마어마하겠죠. 하물며 소프트웨어 비용이 낮아짐과 더불어, 2023년부터는 생성형 AI까지 본격화 되었습니다. 어쩌면 개인용 PC와 종이 문서만큼, 혹은 그 이상의 차이가 생기고 있는 것 같아요.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다음 글에서는 주요 ERP 벤더의 특성과 국내 시장에서 이들이 쓰이는 모습을 짚어보겠습니다.
ERP 시리즈
① 그래서 정말로 “ERP”란 뭔가요?
② 국내 ERP는 왜 SAP 아니면 더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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