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가 없네” 네이버가 KT를 저격한 이유 (feat. 소버린 AI)

“언어도단*이다.”
*말할 길이 끊어졌다는 뜻으로, 어이가 없어서 말하려 해도 말할 수 없음을 이르는 말.
국내 IT 업계에서 보기 드문 신경전이 벌어졌다. 지난 4월 ‘네이버클라우드 테크밋업’에서 나온 말로, 김유원 네이버클라우드 대표는 그 자리에서 KT를 겨냥해 “외산 기술을 들여와 국산 상표를 붙인다고 해서 소버린 AI가 되는 것은 아니”라며 ‘언어도단’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공식 석상에서 다른 회사의 행보를 공개 저격한 것이다. 도대체 ‘소버린 AI’가 뭐라고 네이버클라우드는 ‘어이가 없다’는 말까지 하며 공격적으로 반응했을까?
소버린 AI: ‘자주적인’, ‘주권이 있는’이라는 뜻의 소버린(sovereign)과 AI의 합성어. 대개 자국의 언어, 문화, 제도, 가치관까지 반영한 AI를 일컬으나, 아직 세부 내용이 뚜렷하게 정의되지는 않아 해석이 분분하다.
네이버: 협업 대신 독자 생존으로 ‘소버린 AI’

올해 3월, 네이버 이사회 의장으로 7년 만에 경영에 복귀한 이해진 창업자는 네이버를 ‘구글이나 빅테크에 맞서 25년 동안 견뎌오고 살아왔던 회사’라고 표현했다. 글로벌 기업의 공세에도 불구하고 국내 IT 생태계를 지켜냈다는 자부심이 드러나는 지점이다. 동시에 AI 시대 역시 빅테크와 협업하는 대신 기술력을 바탕으로 독자 생존하는 길을 택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실제로 네이버는 그동안 자체 개발한 초거대 AI 모델 ‘하이퍼클로바X’를 선보이고, 그 경량 모델은 오픈소스로 공개하는 등 기술 내재화에 꾸준히 공을 들였다. 특히 소버린 클라우드와 소버린 AI를 내세우며, 글로벌 빅테크에 맞서 우리나라의 디지털 주권을 수호하는 테크 기업의 이미지 또한 효과적으로 쌓아왔다.
한편 네이버와는 반대로, KT는 작년 6월 마이크로소프트(MS)와 AI, 클라우드, IT 분야를 아우르는 전방위적 파트너십을 체결했다. 그와 함께 KT가 MS의 기술을 활용해 국내 공공 및 금융 고객을 대상으로 하는 소버린 클라우드, 소버린 AI를 공동 개발한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네이버가 추구하는 기술 독립성 기반의 소버린 전략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접근이다. 그런 만큼 네이버 입장에서는 KT 표 ‘소버린 AI’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KT: 협업에 열린 문으로 ‘소버린 AI’

그렇다면, KT는 왜 빅테크와의 협업을 택했을까? 이는 네이버와 KT의 근본적인 차이에서 기인한다. 네이버의 정체성이 플랫폼 기업이라면 KT의 정체성은 기간통신사업자, 즉 인터넷 회선(망) 기업이다. 따라서 KT는 인터넷 회선을 기반으로 부가 가치를 창출하는 사업이 최우선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데이터센터(IDC)다. IDC, 즉 인터넷 회선, 서버, 상면 판매에 있어 국적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아마존웹서비스(AWS), MS, 구글처럼 대규모 트래픽을 발생시키는 글로벌 기업은 KT 입장에서는 반가운 고객이기에, 굳이 척질 필요가 없다.
KT의 클라우드 사업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1999년부터 IDC 사업을 영위해 온 KT는 IT 인프라의 패러다임이 소유(전산실, IDC)에서 공유(클라우드)로 변화하며 위기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클라우드의 발전으로 IDC 매출이 줄어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자체 클라우드를 운영하는 한편, (KT의 IDC에 입주한) 글로벌 클라우드 기업과의 시너지도 강화해야 했다. 그에 따라 클라우드 본부와 데이터센터 본부로 구성된 KT클라우드가 2022년 설립됐다.

이렇게 탄생한 KT클라우드는 기술 내재화를 중심에 두는 네이버클라우드과 달리 글로벌 기업과의 협업에 개방적이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서비스가 HCX(Hyper Connectivity eXchange)로, 이는 KT클라우드의 IDC에 입주한 기업이 AWS, MS, 구글, 오라클, 텐센트 클라우드 등을 멀티 또는 하이브리드로 구성할 수 있게 지원한다. 글로벌 클라우드를 배제하거나 그들과 직접적으로 경쟁하기보다는 공존을 선택한 결과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KT와 MS의 협업이 완전히 놀라운 소식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MS와의 협업은 KT가 AI, 클라우드, IDC를 모두 갖춘 ‘풀스택 사업자’로서 효과적으로 나아가기 위한 기회였으리라 보인다.
나에게 유리하면 ‘소버린 AI’?
네이버가 KT의 ‘소버린 AI’ 전략을 저격하고 일주일이 지나서야 KT는 입장을 밝혔다. KT클라우드 서밋 2025 행사 현장에서 기자들과 만난 최지웅 KT클라우드 대표는 “소버린 AI의 핵심은 기술의 국적이 아닌 데이터 주도권에 있다”며 “AI를 통해 국민과 기업이 얼마나 실질적 이익과 효과를 얻느냐를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네이버와 KT 간 해석의 차이가 발생하는 원인은 아직 소버린 AI의 정의가 명확하지 않다는 데 있다. 현재 소버린 AI는 ‘자국의 언어, 문화, 제도, 가치관까지 반영한 AI’ 정도로 해석된다. 데이터, 기술, 인프라 등에 대한 통제권이나 자주성에 대한 부분은 뚜렷하게 정의된 바가 없다. 그 때문에 각자 생존에 유리한 관점에서 소버린 AI를 정의하고 있으며, 그에 따라 네이버 대 KT와 같은 논쟁이 발생한 것이다.
예를 들어 네이버의 소버린 AI는 ‘기술 독립성’에 초점을 맞춘다. 물론 국가 경쟁력 및 안보와 직결되는 IT 분야에서 특정 국가나 기업에 종속되지 않는 생태계 구축은 무척 중요하다. 하지만 네이버가 소버린 AI를 강조하는 이유는 여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빅테크와의 협업 대신 기술 내재화와 독자 생존을 선택해 온 네이버에 있어 소버린은 전략적으로 무척 중요한 키워드이다. 소버린이 강조될수록 업계에서는 해외 기업과 외산 제품에 대한 경계가 커진다. 그렇게 국내 기업 대상으로 유리한 여론을 조성할 수 있으며 공공, 금융, 국방 등 보안에 민감한 분야에서 경각심을 일으키기도 쉽다. 나아가 글로벌 빅테크에 대항하는 국내 기업으로서의 정체성과 책임감, 디지털 통상 압박에 시달리는 정부에 어느 정도 명분을 제공하는 일도 가능하다.
반면 협업을 선택한 KT는 기술의 국적을 따져서는 유리할 지점이 없다. KT의 소버린 AI는 데이터와 인프라를 강조하며 AI가 가져오는 실질적인 효용을 앞세운다. 자체 보유한 회선과 IDC 등을 최대한으로 활용해 시너지를 내고 실익을 취하기 위함이다. “특정 기술에 한정돼서는 AI를 활용해 국가 차원에서 생산성을 높이기 어렵다”는 KT의 언급은 앞선 글로벌 기술을 빠르게 수용하고 활용해 부가가치를 창출하겠다는 목적의식을 드러낸다.
마치며: 결국은 살아남기 위한 경쟁

소버린 AI를 보는 네이버와 KT의 입장 차이는 서로 다른 기업의 정체성과 생존 전략에서 비롯된다. 네이버가 KT를 저격한 것 역시 결국은 자신들의 생존 전략을 망치려 하는 움직임에 대한 대응이라 볼 수 있다.
현재로서는 소버린 AI 자체를 뚜렷하게 정의할 수 없는 상황이므로 옳고 그름을 판가름하기는 어렵다. 국산 기술을 누구보다 강조하는 네이버는 모순적이게도 소버린 AI 모델을 중동과 동남아시아에 적극 수출하고 있다. 한편, 기간통신사업자인 KT가 빅테크의 손을 잡은 것 역시 마냥 바람직하다고 볼 수만은 없다.
물론 거대 자본으로 규모의 경제를 일찌감치 이룩한 글로벌 빅테크의 영향력 앞에 마냥 점잖게 대응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이번 해프닝이 양사의 신경전으로만 그치는 것이 그야말로 ‘어이가 없는’ 상황이 아닐까?
소버린 AI를 둘러싼 해석이 조금씩 갈린다 해도 우리나라의 국익에 기여하며 가치를 보호한다는 본질에는 변함이 없다. 이를 위해서는 기술의 상표를 놓고 옥신각신하기보다는, 이렇다 할 족적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진 ‘한국형 OOO’ 서비스들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성능과 경쟁력, 차별점을 고민하고 재고해야 한다. 결국 이러한 방향성에 부합하는 AI를 구현함으로써 종속성에서 탈피하고 AI 생태계를 강화하는 데 성공한다면, 네이버든 KT든 굳이 스스로 주장하지 않아도 진정한 소버린 AI 기업으로 거듭나리라 생각된다.
+새 정부의 소버린 AI는?
AI와 주권을 바라보는 관점은 기업뿐만 아니라 국가 간에도 차이가 있다. 미국 바이든 행정부는 임기가 한 주 남은 지난 1월, 수출 규제를 골자로 하는 AI 확산 프레임워크(Framework for Artificial Intelligence Diffusion)를 발표했다. 전 세계 국가를 3단계로 분류해 AI 반도체(칩) 수출 규제를 적용하는 것이 핵심으로, 중국, 러시아, 북한, 이라크, 시리아 등 3단계로 분류된 22개 국가는 미국 반도체 수입이 원천 차단된다. 특히 중국이 미국산 AI 칩을 우회 수입하는 경로를 막으며, AI를 외교 수단으로 활용해 미국 중심의 디지털 질서를 설계하려는 것으로 풀이됐다. (현재 트럼프 행정부는 해당 규제를 폐지한 상태이다.)
반면 중국은 다자주의에 기반한 AI 거버넌스를 확산함으로써 미국의 자국 우선주의를 견제하고자 한다. 국가 내부적으로는 기업이 LLM을 배포하기 전, 사전 승인을 받도록 해 리스크를 통제하고 있다.
중동 역시 소버린 AI에 적극적이다.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UAE) 등 국가는 석유 의존도를 낮추고 AI 기반 고부가가치 산업을 육성해 경제 구조를 전환하는 장기 전략을 세우고 있다. 이들은 문화나 종교적 가치관을 반영한 아랍어 기반 소버린 AI를 개발하고자 한다. 단, 자체 개발 대신 기술력 있는 해외 기업과의 파트너십을 지향한다. 오픈AI, MS, 엔비디아, 메타 등 내로라하는 글로벌 AI 기업이 이미 중동 국가들과 손을 잡았으며, 우리나라에서도 네이버, 리벨리온, 뤼튼테크놀로지스 등 기업이 ‘중동 드림’ 실현을 위해 사막으로 향하고 있다.

그렇다면 새로 출범한 이재명 정부의 소버린 AI는 어떤 색깔을 띨까? 얼마 전 발표된 깜짝 인사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새롭게 설치된 정책실장 산하 AI 미래기획수석(이하 AI 수석)으로 하정우 네이버클라우드 AI이노베이션센터장이 발탁된 것이다. 네이버의 LLM 하이퍼클로바X 개발을 총괄한 그는 ‘소버린 AI 전도사’라고 불릴 정도로 네이버의 소버린 AI 전략을 강조하고 전파해 온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 초대 AI 수석으로서 AI 100조 투자 공약을 체계화하고 추진하는 컨트롤타워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를 계기로 네이버의 소버린 AI 전략에도 힘이 실릴 것이라는 전망이다. 상징성 있는 AI 수석의 자리를 네이버가 가져감에 따라 KT로서는 공공 AI 담론을 이끌어갈 기회를 놓친 것이 뼈아프다.
더불어 이재명 정부가 내세운 ‘모두의 AI’ 공약에도 다시 한번 관심이 쏠리고 있다. 모두의 AI는 일종의 ‘한국형 챗GPT’를 구축해 전 국민이 무료로 사용할 수 있게 만든다는 생성형 AI 프로젝트다. 공공 AI 접근성을 확대하며, 데이터를 빠르게 확보하고 다른 산업과의 융합을 촉진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됐다. 이 정책 역시 외부 기술을 활용하는 대신 정부와 민간 기업의 공동 개발로 자체 AI 모델을 만든다는 점에서 KT보다는 네이버의 소버린 AI와 궤를 함께한다. 이러한 AI 정책 수행이 본격화되면 정부 차원의 소버린 AI도 보다 명확해지며 산업 전반에 생기를 불어넣을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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