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소프트웨어가 유통업을 먹어치우고 있는가?
소프트웨어가 유통업을 잠식하다
최근 유통업계에서 가장 눈에 띈 소식은 지난해 쿠팡 매출이 40조 원을 돌파했다는 기사였습니다. 그 의미를 종합적으로 보기 위해서 퍼플렉시티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렇게 의미를 요약해 주었습니다.
쿠팡은 2024년 연간 매출 41조2901억 원을 기록하며 국내 유통업계 최초로 40조 원 벽을 돌파했습니다. 이는 전년 대비 29% 성장한 수치로, 창립 이후 14년 만에 86배 성장한 결과입니다.
‘국내 유통업계 최초’라는 수식으로, 쿠팡의 성과를 기존 유통 대기업과 비교한 값은 놀라움을 피부로 느끼게 해 주는 듯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쿠팡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저와 같은 사람에게 왜 큰 의미로 다가왔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유명한 기사 ‘Why Software Is Eating The World’가 떠올랐습니다. 더불어 2011년 이후 제가 이커머스 업계에서 겪은 경험들이 재해석되었습니다. 그래서, 저 마크 앤드리슨의 기사 제목을 패러디한 후에 제 경험을 이 글에 담아 봅니다.
이커머스 혁신의 초기 풍경
사실 저는 2010년까지만 해도 이커머스 사이트에 ID 하나 없는 오프라인 구매자였습니다. 당시 제 삶의 8할은 소프트웨어 개발과 개발자 커뮤니티 육성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그랬던 제가 유통업을 이해하게 된 계기는 역시 개발 때문이었습니다.
2011년 IT 컨설팅 회사에 다니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름을 대면 대부분 알 수 있는 대기업 산하의 이커머스 회사에서 프로젝트 의뢰를 받았습니다. 계약 과정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제가 다니던 회사의 대표이사는 반신반의했습니다. 당시 제가 주로 맡던 일들은 프레임워크 구축이나 개발 플랫폼을 만드는 소프트웨어 집약적인 일이었는데 그때까지 시장에서 유통업계가 그런 일을 하는 경우가 없었기 때문이었죠.
결과적으로 저는 연속 계약으로, 고객사가 추구하던 ‘혁신’ 활동과 관련한 프로젝트를 4년 이상 수행하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스타트업이나 인터넷 기반 벤처 기업이 아닌 대기업에서 했던 활동인지라 한 발 떨어져서 바라보면 이커머스 혹은 유통 업계의 변화 양상이 고스란히 담긴 사례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도 플랫폼 기업이 되고 싶어요!
2011년 그 유통 대기업 클라이언트를 만났을 때, 최대의 화두는 ‘플랫폼’이었습니다. 그렇게 프로젝트를 시작하며, 폭넓은 인터뷰를 통해 구성원들이 생각하는 ‘플랫폼’이 무엇인지 알아 보았습니다. 놀랍게도 목소리를 내는 분들은 극소수였는데, 그들 사이에서도 상당한 시각 차이가 있었습니다. (제가 ‘좋은 플랫폼, 나쁜 플랫폼, 이상한 플랫폼’을 쓰게 된 배경에 그 때 경험이 있습니다. 꽤나 시간이 지났지만, 요즘도 플랫폼이라는 말을 사용하면 혼선이 나타남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죠.)
아무튼 당시 플랫폼이라는 말의 지향점 중에 가장 가시적인 것을 꼽으라면 아마존이 구축한 무언가를 따라 베스트 프랙티스(Best Practices)를 찾고 구현해 내는 것이었습니다. 4년의 시행착오 끝에 저 역시 그 혼란의 경계는 무엇이었으며, 무엇을 잘 했고 무엇을 실수했는지 비로소 알 수 있었습니다.
당시 우리는 다양한 옵션을 검토했습니다. 모바일 환경에 맞춰 프로그램을 개선하는 일에서 출발해서 개발 조직이나 개발 방식에 변화를 가하는 기본적인 활동은 물론이고 빅데이터나 데이터 분석 기반의 연구 개발을 하거나, 인도를 중심으로 한 다국적 소프트웨어 전문 기업과 협업해 보기도 하고, 쇼핑몰 전문 기업 인수를 검토하기도 했습니다.
돌아 보면 큰 틀에서는 기존의 이커머스 업계에 기술을 접목시켜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는 일이 당시 프로젝트의 비전이었다고 하겠습니다. 그간 조직에서 해 보지 않았던 일을 하려다 보니 시행착오의 범위가 꽤 넓었고 갈등도 컸습니다.
쿠팡에 대한 지인들의 이야기를 되짚어 보면
당시 놀라운 일이 하나 있었는데, 지금은 국내 유통업계 최초로 40조 원 벽을 돌파한 쿠팡의 창업주가 당시 클라이언트 임원 회의에 초대된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제가 직접 참여하지 않아서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굉장히 신선하다는 느낌과 함께 대기업 사주가 열린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시간이 한참 더 흐른 후에 당시 그 일을 주도했던 클라이언트 기업의 임원과 만나 그때를 회고한 적이 있습니다. 그 임원은 쿠팡이 대기업은 불가능한 방식으로 물류를 혁신해 나가는 모습을 기존 조직은 그대로 볼 수 밖에 없었다는 말을 했습니다. 반면 저는 그 회사의 문법으로 그처럼 새로운 기술을 소화해서 일상 활동으로 녹여 내지 못한 점이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어지는 대화에서는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유관 기관이나 시장의 시선이 주요한 관리 대상이란 점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반면 스타트업이나 벤처는 기존 시장의 규제를 넘어서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사회적 소란과 갈등도 함께 넘어서야 기회를 만난다는 점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중국에 살던 시절, 그러니까 2018년 즈음으로 추측이 되는데요. 당시 쿠팡의 누적 적자가 심해질 때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쿠팡의 전략이 잘못되었다고 자신 있게 주장을 펼쳤던 일이 기억납니다. 일면 합리적인 의견들이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그들 모두 대한민국의 주류 의견을 쫓은 것이기에, 쿠팡의 ‘새로운’ 길을 해석하는 데에는 그 합리 자체가 장애물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 만의 특징을 살릴 수 있는 쇼핑몰을 만들어 주세요
화제를 조금 바꾸어 보겠습니다. 2012년 당시 저와 같은 회사 동료였던 이사님 한 분은 외주 개발 팀을 이끌고 있었습니다. 쇼핑몰 구축 의뢰가 들어온다면서 그는 저에게 적정가 의뢰를 묻곤 했는데, 마음 속에 30억 원 정도를 적정가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인건비를 고려하면 무리한 금액은 아니지만 그 정도 투자를 하고 손익분기점을 넘는 기업이 생길 수 있는지에 대해 그때는 굉장히 회의적이었습니다.
또한, 당시 저는 사용자 경험(User experience)에 대해 배우기 위해 디자인 회사를 운영하시는 UX 전문가와 교류하고 있기도 했습니다. 거꾸로 그 분은 저에게 판에 박힌 쇼핑몰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특성화에 초점을 둔 전문몰 구축 솔루션이 시장에 꼭 필요하다며 설득하려고 했습니다. 제가 중국으로 떠난 이후에 보니 그러한 시장의 필요성은 지금의 무신사나 에이블리 같은 모습으로 구현된 듯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막연한 추정이었지만, 이미 많은 이커머스 플레이어가 있는 상태에서 새롭게 정체성을 갖추고 싶어 하는 욕구가 그때의 시장에 있었다는 점은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다만, 제 경험으로는 그것이 어디를 지향하는지 당시에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와서 보니 그 욕구는 기업이 직접 소비자에게 소비에 대한 제안을 해 주는 형태로 발전해 나간 듯합니다. 생산물의 유통이 아니라 “소비자의 만족도 증진 쪽에 조금 더 초점이 맞춰진 이커머스”라고 이름을 지어볼 수 있을 듯합니다.
유통업을 먹어치운 소프트웨어의 위상
국내 이커머스 기업과의 협업은 2015년까지였고, 2016년 이후에 저는 새로운 도전을 찾아 중국 땅을 밟았습니다. 거기서도 크게 보면 제가 맡은 일은 유통업의 디지털 전환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번에는 백화점에서 의류를 파는 거대기업이 온라인 판매에 적응할 수 있도록 가교 역할을 할 소위 O2O(Online-To-Offline) 솔루션을 만들어 공급했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중국에서 철수하며 한 때의 추억이 되어 아쉽지만, 역시 4년 넘게 했던 일이라 한 발 떨어져서 바라보면 산업 변천사의 한 장면으로 기록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도 디지털 공간에서 커머스 관련한 일을 그만 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변모한 시장 환경을 겪으며 느낀 가장 두드러진 점은 아래 인공지능이 요약해 준 거래액 표에 드러납니다. 고도 성장을 자랑했던 대한민국에서 유통을 책임졌던 대기업을 제치고 수십조 원 규모로 성장한 이커머스 기업들의 바탕에 있는 것은 ‘새마을 운동’을 하던 시절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바로 그 소프트웨어입니다.

일례로, 경제 뉴스를 보면 굉장히 저명한 분들도 소프트웨어를 이해하지 못하면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전망을 내놓는 장면들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며
마지막으로 이러한 유통업의 변화에서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첨언하는 것으로 글을 마치겠습니다.
우선 전통의 강자들은 소프트웨어를 이해한 사람들을 최고 경영자 주변에 두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반드시 후회할 일들이 벌어질 것입니다.
한편 새롭게 쇼핑몰을 만드는 일은 그만 두는 편이 좋습니다. 이미 세계의 이커머스 시장은 독과점 시장이 되었고, 직구가 일상화되어 가는 중입니다.

세 번째로, 상품과 정보가 모두 넘쳐 나는 시대에서 새로운 기회는 소비자 대응에 있을 것입니다. 얼마전에 글로벌 플랫폼이 준비한 행사에 가서 아마존이 제공하는 인공지능 도우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아직은 불편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마치 테슬라의 자율주행처럼 편리해질 것으로 보였습니다. 라스트 마일까지, 아마존이 택배에서 디지털 공간으로 비즈니스 영역을 넓혀 가는 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들 모두 결국은 소프트웨어적으로 생각하거나 디지털 공간에서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습니다. 바로 그러한 적응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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