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23일, 소니에서 한 가지 발표가 있었다. 바로 기록용 블루레이(Blu-ray)에 대한 생산을 중단한다는 내용이었다. 중단 목록에는 블루레이뿐만 아니라, 녹음용 미니디스크, 미니 DV 카세트 등 “이젠 정말 아무도 안 쓰지 않나?” 같은 매체도 포함되어 있어, 한 시대가 끝나간다는 인상을 주었다. 생산은 2월 중에 중단될 예정이다. 개인적으로는 조금 쓸쓸한 느낌이 든다. <출처: 구글 이미지, 작가 편집> 물론 소니가 발매하는 영화나 게임이 더 이상 블루레이로 출시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생산이 중단되는 것은 ‘기록용’으로 판매되는 공(空) 블루레이다. 파일을 보관할 때 클라우드 저장소를 사용하는 것이 당연한 시대이니 그럴 만도 하다. 이제는 PC나 노트북에 디스크 드라이브도 거의 없다. 1. 얼마나 안 팔렸길래 생산을 중단한 걸까?<출처: 구글 이미지, 작가 편집> 블루레이 디스크는 아직 전 세계적으로 흔히 보이는 매체지만, 기록용 블루레이의 경우 주요 시장은 일본이다. 애초에 블루레이라는 것이 소니를 비롯한 일본 제조사들이 중심이 된 협회에서 개발한 규격이다. 일본에서는 오래전부터 TV 방송을 블루레이 같은 매체에 녹화해서 보는 문화가 있어 기록용 블루레이에 대한 수요가 여전히 존재한다. 참고로 쿠팡에서 ‘블루레이 공디스크’로 검색해 보면 대부분 일본 상품이다. 그러나 블루레이 레코더(블루레이를 기록하고 재생하는 기기)의 판매량은 꾸준한 하락세다. 일본 블루레이 레코더의 2024년 시장 규모는 2022년에 비해 40%나 감소했다. 게다가 기록용 블루레이 시장에서의 철수는 이미 2023년 2월에 파나소닉이 소니보다 먼저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블루레이가 크게 보급된 것은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3 영향이 컸기에 소니의 이번 발표가 훨씬 큰 주목받았다. 쇠퇴의 이유는 다들 예상했던 대로다. 스마트폰, 유튜브, 틱톡, OTT 등의 인기로 실물 매체는 빠른 속도로 사라지는 중이다. 실물 매체를 사용하더라도 USB나 외장하드가 있으니 굳이 번거롭게 블루레이 같은 광디스크를 사용할 이유가 없다. 광디스크는 레코더 같은 별도 기기가 필요하고, 휴대성이 좋지 않아 뚜렷한 장점이 없다. 2. 광디스크가 걸어온 길<출처: goodfon.com> 광디스크는 1978년 레이저디스크부터 시작해, CD, DVD, 블루레이까지 발전해 왔으나, 이제는 확정적으로 사라질 운명에 접어든 것 같다. 그러나 멋대로 죽음을 선고하기 전 지금까지의 발자취를 되돌아보자. <출처: wikipedia.org, 작가 편집> 3. 사람들은 왜 디지털을 더 선호할까?<출처: youtube, 작가 캡처> 가장 큰 이유는 간편해서일 것이다. 블루레이 영화를 재생하려면 실물 디스크를 사야 하고, 케이스를 뜯어 재생 기기에 삽입해야 한다. 재생 기기가 없으면 따로 구비해야 한다. 게다가 휴대폰이나 아이패드에서는 재생하지 못하고 재생 기기와 연결된 화면에서만 볼 수 있다. 실물 케이스를 보관하기 위한 선반도 필요하다. 클릭 한 번에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디지털에 비해 아주 번거롭다. 저렴함도 무시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넷플릭스를 구독하는데 드는 비용은 한 달에 10~20달러 정도다. 그에 비해 블루레이는 영화 한 편에 15달러 정도다. “수천 개의 영화를 단돈 10~20달러에 볼 수 있는 스트리밍이 블루레이보다 훨씬 이득이다”라는 결론은 너무 당연하다. 물론 좋아하는 영화를 4K 블루레이로 몰입해서 보는 경험에 값을 매기기는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넷플릭스에 수천 개 영화가 있다고 해도 다 보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영화 한 편에 15달러라는 가격은 비싸게 느껴지는 시대가 되었다. 미국의 DEG(The Digital Entertainment Group) 협회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미국 가정에서 소비되는 영상 콘텐츠 매출의 96%가 디지털 형태라고 한다(2023년 기준). 그중 스트리밍이 86%로 압도적이고, 나머지 10%는 VOD나 디지털 구매에서 발생한다. 물론 영화관을 제외하고 가정에서 소비하는 매출로 한정한 조사지만, 실물 매체의 비율이 4%밖에 되지 않는다니 솔직히 충격이었다. 아마 옛날부터 DVD로 봐왔던 사람들, 4K 블루레이를 선호하는 영화 매니아층만 남고 대부분은 디지털로 옮겨간 것이라 추측한다. 기업에서도 디지털을 선호한다. 디스크의 제작과 유통에 드는 비용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물론 플랫폼에 지급하는 수수료도 비용이지만 그 구조가 훨씬 단순하다. <흑백요리사>를 블루레이 형태로 유통해야 한다고 생각해 보자. 국가별 디스크를 개별적으로 생산하고, 수요를 예측하고, 국가별 유통망을 확보하고, 재고를 관리하고, 불량 발생 시의 대응까지… 너무 머리가 아프다. 게다가 지금의 플랫폼은 콘텐츠를 직접 제작까지 하기 때문에 디지털 유통이 훨씬 더 이득이다. 소니도 이를 잘 이해하고 있다. 소니가 유통하는 콘텐츠는 영화, 게임, 음악 등 다양하지만 그중 가장 매출 사이즈가 큰 것은 게임이다. 개인적으로 게임을 좋아하기에 소니의 유통 전략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데, 그들의 디지털 선호는 아주 노골적이다. 2020년에 출시한 플레이스테이션5부터는 디스크 드라이브가 없는 ‘디지털 ONLY’ 버전이 추가되었고, 업그레이드 버전인 플레이스테이션5 프로 모델부터는 디스크 드라이브가 별매 상품으로 빠졌다. 참고로 CD 시절부터 블루레이까지 광디스크 개발에 늘 앞장서 왔던 소니지만, 블루레이를 끝으로 더 이상 새로운 광디스크는 개발할 계획이 없다고 한다. 4. 간편하고 저렴한 것은 무조건 좋은가?<출처: cnet.com> 사람들이 실물보다 디지털 매체를 선호하는 것은 간편함과 가격 때문이라고 위에서 언급했다. 하지만 만약 가격이 똑같다고 해도 사람들은 디지털로 옮겨간다. 실물은 무려 중고로 팔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디지털의 간편함과 즉시성을 이기지 못한다. 예를 들어, 비디오 게임 상품은 실물과 디지털 제품이 동일한 가격에 판매되나 디지털로 판매되는 비율이 더 높다. 2024년에 유럽에서 새로 발매된 게임의 75%가 디지털로 판매되었다고 한다. 플랫폼별로 비율은 다르지만 디지털 판매가 대세인 것은 명백하다. 나 또한 콘텐츠는 모두 디지털 형태로 구매하고 있다. 실물은 관리해야 한다는 사실이 번거롭고, 집 공간을 차지하는 것이 싫다. 게임을 구입하면 그 즉시 즐기고 싶지, 택배를 기다리고 싶지 않다. 중고로 팔 수 없다는 사실, 플랫폼이 서비스를 종료하면 나의 라이브러리가 모두 날아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실물로 돌아가기에는 번거롭다. 다만 게임을 구입하는 행위가 간편해지면서 한 가지 재밌는 현상이 발견됐다. 게임을 사놓고 플레이하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인터넷 매체 ars TECHNICA에 따르면, 게임 플랫폼 스팀(Steam)의 유저 라이브러리에 등록된 게임 중 37%가 한 번도 플레이되지 않았다고 한다. 10년 전 조사라 인용하기엔 좀 그렇지만 지금은 더 심하면 심해졌지 낮아지진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결제 수단이 늘어나고, 세일 이벤트가 자주 열리면서 이러한 현상은 더욱 가속화되었을 것이다. 저렴함에 관련해서도 짧게 이야기해 보자. 넷플릭스처럼 매달 구독해서 이용하는 플랫폼의 경우, 콘텐츠를 하나씩 구입하는 것이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로 저렴하다. 그러나 콘텐츠 1개당 내가 지불하는 가격이 너무 저렴한 나머지, 드라마나 영화에 몰입하는 정도가 흐려졌다. 다들 넷플릭스 첫 화면에서 이리저리 섬네일만 훑다가 시간을 보내는 짓을 한 번쯤 해봤을 것이다. “재밌는 거 없나?” 고민하며 스크롤만 하다가 시간을 날린 기억 말이다. 반면 2만 원을 주고 산 블루레이 영화라면 재미가 없더라도 꾸역꾸역 끝까지 볼 확률이 더 높다. 중간에 꺼버릴 경우 돈을 날렸다는 손해감이 더 크기 때문이다. 반대로 넷플릭스에서는 중간에 꺼도 아무런 손해를 보지 않는다. 그래서 뭘 보더라도 정자세로 몰입할 확률이 줄어든다. 대충 보는 것에 대한 금전적 대가가 덜 와닿기 때문이다. 영화를 틀어놓고 휴대폰으로 딴짓하는 사람이 늘어난 것도 그 때문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OTT 플랫폼들은 콘텐츠 제작자들에게 “배경으로 틀어놔도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달라(This isn't second screen enough)”는 주문을 넣고 있다. 만약 영화관 입장료가 100원이라면, 같은 영화라도 중간에 퇴장하는 사람들의 수가 15,000원을 낸 사람들보다 많을 것이다. 뭘 하든 개인의 선택이지만, 선택지에 리스크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결론: 불편함의 낭만<내용 요약>1. 2024년 일본 블루레이 레코더 시장은 2022년에 비해 40%나 감소했으며, 소니는 기록용 블루레이의 생산을 곧 중단할 예정이다.2. 상업용 광디스크 매체는 1978년 레이저디스크부터 시작해 CD와 DVD를 거쳐 2006년에 첫 등장한 블루레이까지 발전했다.3. 디지털 콘텐츠의 간편함과 저렴함으로 인해 실물 매체는 급속히 사라지고 있으며, 블루레이를 잇는 후속 매체는 등장하지 않을 전망이다.4. 그러나 실물 매체만의 매력이 있기 때문에 블루레이가 멸종할 것 같지는 않다. 누군가가 말하길 캠핑의 매력은 ‘불편함을 즐기는 것’이라고 한다. 나는 캠핑에는 관심이 없지만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 것 같다. 사람들이 굳이 직접 빵을 굽거나, 뜨개질하는 것처럼 번거로움에서 우러나오는 즐거움이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블루레이의 수명은 아직 한참 남았다고 생각한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비록 디지털 재생에 비해 번거롭고 비싸지만, 그러므로 인해 느낄 수 있는 고유한 경험이 있다. 불편하고 제약이 많은 만큼 그냥 앉아서 보게 된다. 재미가 없어도 돈값은 뽑자는 마음에 끝까지 보게 되고, 그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재미를 발견할 때도 있다. 어차피 영화를 본다는 점에서는 똑같은데, 왠지 OTT에서 보는 것보다는 바른 자세로 보게 된다. 형식은 생각보다 많은 영향을 미친다. 이번에 소니가 기록용 블루레이의 생산을 중단한 것은 예상된 순서였을 것이다. 수익성이 없는 사업을 정리하는 합리적인 판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록용 블루레이를 생산하는 것은 소니만 있는 것이 아니니 당분간 이 시장은 살아있을 것이다. 물론 디지털 시대가 가속화되면서 실물 매체의 존재감이 계속해서 희미해져 갈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실물 매체만의 경험은 분명 고유의 가치가 있으며, 사라져 갈지언정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전자책이 있다고 해서 종이책이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인터넷 시대에 여전히 잡지가 살아있는 것처럼, 고유의 가치가 있다면 그에 걸맞은 시장은 계속 존재할 것이다.<참고>How digital is the video games market in 2024?Introducing Steam Gauge: Ars reveals Steam’s most popular gamesJustine Bateman: Pulling AI Into the Arts Is “Absolutely the Wrong Direction” ©️요즘IT의 모든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