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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익스트림 프로그래밍의 저자이자 TDD 개발자인 켄트 벡(Kent Beck)의 <Tidy First?>를 번역하고 있습니다. 2023년 11월에 출간된 책인데, 우연히 켄트 벡의 허락을 받아 번역을 하게 되면서 국내 출간을 앞두고 있습니다. 한동안 번역을 ‘절대 안 하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스스로의 입장에서는 느닷없이 번역을 하게 된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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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

켄트 벡의 글을 번역하며 알게 된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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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익스트림 프로그래밍의 저자이자 TDD 개발자인 켄트 벡(Kent Beck)의 <Tidy First?>를 번역하고 있습니다. 2023년 11월에 출간된 책인데, 우연히 켄트 벡의 허락을 받아 번역을 하게 되면서 국내 출간을 앞두고 있습니다. 한동안 번역을 ‘절대 안 하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스스로의 입장에서는 느닷없이 번역을 하게 된 셈입니다.

 

그래서 스스로도 왜 번역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기로 했습니다. 특히 기억이 아니라 기록에 근거하여(Data Driven) 내가 왜 이것을 하는지 조사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근거가 될 기록을 찾기 위해 과거 사진을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일단, 결론부터 얘기하겠습니다. 서로 다른 두 가지 욕망에서 시작됐습니다.

 

  • 2009년의 기억을 떠올려 정독을 하고 싶다
  • 이제 다시 켄트 벡의 말들을 만나 성장 속도를 높이고 싶다

 

그리고 번역을 하면서 뜻밖의 새로운 배움이 있었기에 번역을 하게 된 과정과 그 과정에서의 배움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2009년의 기억을 떠올려 정독을 하고 싶다

2009년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출처: 작가)

 

2009년, 주경야독하듯이 직업 일상을 보내던 저는 ‘부캐’인 KSUG(한국 스프링 사용자 모임) 공동 설립자로써 미국에서 열린 SpringOne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실수를 하나 저질렀습니다. 위키북스에 번역할 책을 추천해 주면서 스스로 공동 역자로 저를 포함시킨 것입니다. ‘고작 한 장인데, 그걸 못하겠어’ 하고 쉽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저는 IT컨설팅 회사에서 컨설팅과 개발을 함께 하고 있었는데, 상사의 지시를 받지 않고 나만의 방향성을 살리기 위해 직접 영업까지 시도하여 하루를 쪼개 쓰는 중이었습니다. 그런 제가 주말에는 KSUG 활동을 하고 컨퍼런스 참여로 미국 방문까지 해야 하는 시점에 번역까지 하는 건 정말 무리였습니다. 그렇게 될 줄 모르고 한 일이지만, 뱉은 말을 나 몰라라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모자란 잠을 참으며 최종 검토를 하면서 ‘다시는 번역을 하지 않겠다’고 굳게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번역을 하는가?

그동안 켄트 벡의 글을 줄곧 읽어왔습니다. <Tidy First?>를 소재로 글을 5개나 쓰기도 했죠. 처음에는 정확한 뜻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주 읽다 보니 이제 몇 줄만 보아도 그 뜻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정독이 어려울 뿐이었죠.

 

그러던 중에 켄트 백과 링크드인 메시지를 주고받는 일이 생겼습니다. 이를 계기로, 켄트 벡의 개인적인 미션을 알게 되었습니다. “긱(Geek)들이 세상에서 안전하다고 느끼도록 돕는다(Helping geeks feel safe in the world)”는 미션이었죠.

 

(출처: kentbeck.com)

 

그 후에 정독을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작은 회사를 경영하는 와중에 개발에 손을 뗀 지가 한참이라, 코드가 나오는 글은 정독할 만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오늘 행복하거나 가까운 미래에 결과를 맛볼 수 있는 꿈을 꾸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절대로 정독을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 삶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니, 평론가처럼 가능성을 따지는 일을 할 생각은 없습니다. 제 문제는 그저 ‘어떻게 하면 정독을 할 수 있느냐?’인 것이죠. 그랬더니 비행기에서 마치 감옥에 갇힌 사람처럼 번역을 했던 2009년의 경험이 생생하게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독을 하고 싶어? 그렇다면, 답은 나왔네. 번역을 해라!

이렇게 해서 갑자기 번역을 하게 됐습니다. 

 

번역을 하면서

번역을 시작하면서 의도했던 대로 정독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Tidy First?>의 의미를 더 명확히 알게 됐죠. 일례로 제가 <Tidy First?>로 쓴 다섯 가지 글 중 2023년 초에 쓴 <흥미로운 Tidy First 고찰>을 보면 ‘창발적 설계’가 손글씨로 정의되어 있습니다. 이 글을 쓸 때는 느낌만 있을 뿐 그림의 정확한 의미를 알지 못했습니다. <Tidy First?>의 초벌 번역을 마친 지금은 켄트 벡이 25년을 준비한 설계에 대한 노하우를 집필하기 시작한 것이란 사실을 깨닫고, 번역하길 잘했다는 생각을 합니다.

 

(출처: 작가)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시도도 해봤습니다. 여러 가지를 나열한 뒤 “그 밖에도 같은 종류의 것이 더 있음”을 나타낼 때 ‘등’이라는 말을 쉽게 사용하고는 하는데요. 최근에 <한국말 말차림법> 독서 모임을 하는 동료들 다수가 ‘등’ 대신에 ‘따위’를 지지했습니다. 책에 따르면 ‘따위’는 우리말이고, ‘등’은 식민시대부터 일본 글을 따라 쓰면서 생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Tidy First?> 책에도 ‘등’ 대신에 ‘따위’를 넣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출처: 작가)

 

 

다시 켄트 벡의 말들을 만나 성장 속도를 높이고 싶다

번역으로 이끈 두 번째 욕망을 생각해봅니다. 초안 번역을 마치기 전까지는 충동이나 직관에 따라 정독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 무의식이 지향하는 진짜 목표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책의 후반부에 금융 공학 지식을 동원해서 코드 정리의 중요성을 설명하는 부분을 번역하다가 드디어 깨달았습니다.

 

저의 무의식은 말했습니다. 

네가 말했잖아. 소프트웨어 설계의 정의는 변해야 한다고. 근데, 아직 답을 못 찾았잖아? 그렇다면 최소한 너를 TDD 그리고 XP로 이끈 켄트 벡의 이야기는 들어야 하는 것 아냐? 지금 너의 처지를 떠나 스무 해가 넘게 설계를 마음에서 빼내지 않는 너 자신을 속일 거야? 아니면 마냥 미루고 살 거야?

 

(출처: 작가)

 

그 후에 아주 선명해졌습니다. 그래서 페이스북에 짧은 글을 남겼습니다. 당시의 느낌을 되살려 보니, 무의식 속에 숨어 있었으나 지금 분명히 알 수 있는 지향점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소프트웨어 설계를 경제적 관점에서 푸는 일입니다. 솔직히 저는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금융 문맹'으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경제나 금융 문제에 대해서는 등한히 살아왔습니다. 최근 나름대로 노력하며 경제적 감각을 익히고 있긴 한데, 무엇보다 회사에서 벌어지는 매출, 비용과 개발 결과물의 효용성의 함수 관계를 풀고 싶었습니다. 당장의 매출과 연관이 없고, 책을 보고 얻는 아이디어 외에는 혼자서 궁리하는 일이라 진척이 매우 더딘 상태였죠. 

 

그러던 차에, 책의 후반부에서 현금 흐름과 옵션의 관점에서 소프트웨어의 현재 가치를 평가하는 관점을 소개하는 부분을 읽을 때, 약간 과장을 섞으면 운명과도 같았습니다. 제가 혼자 고민을 해도 찾지 못하던 ‘빠진 부분’이 바로 그 지점이었으니까요.

 

만일 이렇게 번역을 하지 않았더라면 제가 금융 개념을 다 이해할 때까지 파고들 가능성은 없습니다. 배우는 데에서도 실용이 중요한 저는 필요하다고 느낀다 해도 좋아하지 않는 주제는 끝까지 파고들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번역을 해야 하는 상황은 전혀 다릅니다. 스트레스를 느끼는 자신을 대면하게 되지만, 동시에 책임감으로 평소 넘지 못 하던 산을 넘어가는 자신도 동시에 발견합니다.

 

아직 갈 길이 한참 남은 저의 목표지만, 아무튼 켄트 벡이 책에 담은 금융 지식과 소프트웨어를 연결한 내용을 숙지하는 것은 2016년 이후부터 풀어 보기 시작했던 SaaS 사업의 재무적인 생존 방법을 풀어 내는 데 분명 어떤 기여를 할 것이라 확신합니다.

 

2016년 당시 클라우드 사업의 특징에 대해서 논의할 때, 지금은 동료가 된 클라이언트가 그린 그림(출처: 작가)

 

두 번째는 사실 꽤 오랫동안 켄트 벡의 정신을 좇아왔으며, 그것이 앞으로 해야 할 일로 저를 이끌어왔다는 사실입니다. 2015년 IT컨설팅 회사에서 팀원들 다수가 제가 믿는 소프트웨어에 대한 가치에 공감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고 굉장히 실망한 일이 있었습니다. 돌아보면 미숙한 의사소통의 결과였죠. 아무튼 그렇게 실망했던 어느 날 켄트 벡의 한 트윗을 보았습니다. 그가 삭제한 것인지 아니면 제 기억의 왜곡인지 지금은 찾을 수가 없는데요.

 

기억에는 대략 ‘오늘 무슨 일이 있었어도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코드를 더 나은 코드(better code)로 만들 수 있다’에 해당하는 영문이었습니다. 그의 글을 보자마자 핑계 속으로 숨지 않는 정신과 XP*를 통해 익숙하게 익힌 실천법이 느껴졌습니다.

* 익스트림 프로그래밍(Extreme Programming), 켄트 벡 , 신시아 안드레스 저자(글) · 김창준 , 정지호 번역, 인사이트 2006년

 

‘그래. 나는 나의 길을 걷자.’ 이런 마음을 새겨 두려고 퇴근 후에  bettercode.kr 도메인을 샀습니다. 이제 와 돌아보면, 그 도메인을 산 순간부터 제가 알 수 없는 어떤 인연이 만들어졌고, 저는 그저 ‘계속할 것이냐 아니냐’의 선택의 기로에서 지금까지 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하자면 운명론자처럼 된 것인데요. 제가 도메인을 샀다는 사실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던 중, 그로부터 1년 후에 중국에 갈 일이 생기고, 회사가 필요해졌습니다. 그때 저에게 중국 관련 사업을 제안했던 후배에게 전화를 걸어 상의를 하다가 ‘회사 이름이 무엇이 좋겠냐?’라는 그의 전화기너머 음성을 들을 때, 도메인 이름을 퍼뜩 기억해 낸 것이 그다음 연결고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운명론자의 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는지 아직 말하기 어렵지만, 언젠가는 또 조금씩 알게 될 듯합니다. 

 

 

마치며: 상상도 못하던 것을 또 배운다

서두에 말한 주제에 대한 부연은 다 했습니다. 애초에 정독이 목표였는데, 번역 과정에서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성장 욕구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깨닫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더하여 함께하는 즐거움도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세 가지 정도를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첫 번째는 베타 리더들의 헌신성과 자율성이 맛보게 해준 감동입니다. 단기간에 번역을 해야 했기에, 제가 장별로 번역한 내용을 구글 닥스에 올리면 베타리더가 장별로 피드백하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 번역 진도를 우선하느라 베타리더의 피드백을 몰아서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제가 잠시 손을 대지 못한 문서 내용도 베타 리더분들이 손수 가꾸고 계시더군요. 그에 대한 고마움과 함께, 순수하게 함께하는 즐거움도 느꼈습니다.

 

(출처: 작가)

 

두 번째로, 2008년에 한 프로젝트에서 만나, 나이를 초월한 교류를 이어가고 있는 임춘봉 님을 통해 지치지 않는 활력을 다시금 배웠습니다. 그는 저희 어머니와 정확히 동갑이지만 소프트웨어나 지식 노동에 대한 가치관이 비슷해서 지금까지 특별한 이해관계없이 교류하는 분입니다.

 

<Tidy First?>를 한창 번역하는 중에 이 책의 출간 배경에 ‘에드워드 요던(Edward Yourdon)’이라는 전설적인 소프트웨어 공학자가 있다는 내용*을 읽고 임춘봉 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자인 켄트 벡이 요던을 대하는 태도와 임춘봉 님이 평소 요던의 책을 언급할 때 태도가 너무나 닮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바로 전화를 해서 뵙자 하고, 마침 출판사에 받은 원서 한 권을 들고나가서, ‘그 사연'을 알려 드리고 책도 드렸습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임춘봉 님은 폭발적인 속도로 번역을 돕고 계십니다.

*<How I Came To Write “Tidy First>라는 글에서 켄트 벡은 책을 쓰게 된 배경을 설명하는데, 에드워드 요던, 래리 콘스탄틴이 슨 <Structured Design>에서 영감을 받았음을 밝히고 있다.

 

늘 열심히 사는 분이었지만, 젊은 날의 열정을 기폭제로 또 활력을 얻어 열정을 불사르는 모습을 보는 일은 저에게 새로운 배움이 됩니다.

 

(출처: 작가)

 

마지막으로, 저자인 켄트 벡의 태도에서도 배우고 있습니다. 제가 링크드인 메시지를 통해 번역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렸을 때, 그는 축하의 말을 전한 후 ‘문장이 모호하면 어느 때고 자신에게 질문을 하라’고 메시지를 주었습니다. 그것이 ‘모국어로 영어를 배우지 않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문장을 쓸 수 있도록 자신을 훈련할 수 있는 길’이라는 이유였습니다.

 

(출처: 작가)

 

굉장히 인상적인 메시지였습니다만, 더욱 인상적인 것은 그가 지금까지 저의 거의 모든 질문에 대해 최선을 다해 답을 해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나 최근에 주고받은 내용 중에 인상 깊었던 답변은, 저의 질문에 도리어 고맙다는 표현을 하면서, 자신의 글쓰기가 지나치게 함축적이라는 인식을 덧붙였던 것이었습니다. 이는 직면을 통해 스스로 성장하기로 마음먹은 저에게 그대로 본보기가 되어 줍니다.

 

(출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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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0
안영회
작가
            @ianstream 출판사에 말씀드리겠습니다.
          
2024.02.15. 오후 15:35
베터코드 C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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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터코드 CEO
96
명 알림 받는 중
프로그래머로 사회 생활을 시작해서 IT 컨설팅과 IT 서비스 회사 경영자로 동종 업계에서 스무 해 이상 일 하고 있습니다. 한 때는 한국 스프링 사용자 모임을 만들어 운영했던 만큼 커뮤니티 활동과 지식 공유를 즐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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