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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브랜드 디자이너로서 운이 좋았다. 다니던 디자인 회사를 그만두고, 브랜딩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에 합류했다. 혼자 일하던 방식을 깨고 좋은 동료들과 함께 성장할 수 있었다. 또한 안경 브랜드부터 반려동물, 테라피, 코스메틱 브랜드 그리고 가수 브랜딩까지 다양한 프로젝트를 경험했다. 여러 분야에 걸쳐 좋은 결과물을 만드는 과정을 배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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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브랜드 디자이너로서 운이 좋았다. 다니던 디자인 회사를 그만두고, 브랜딩을 전문으로 하는 회사에 합류했다. 혼자 일하던 방식을 깨고 좋은 동료들과 함께 성장할 수 있었다. 또한 안경 브랜드부터 반려동물, 테라피, 코스메틱 브랜드 그리고 가수 브랜딩까지 다양한 프로젝트를 경험했다. 여러 분야에 걸쳐 좋은 결과물을 만드는 과정을 배울 수 있었다.
더불어 브랜딩이라는 세계에 스스로를 던져 치열하게 발버둥 쳤던 한 해였다. 열심히 일한 만큼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브랜드 디자이너로서 올해 어떤 것들을 배웠는지, 한 해를 회고하며 인사이트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디자인 시장은 계속 커지고 있지만, 디자인의 단가는 낮아지고 있다. 특히 유튜브를 필두로 디지털 콘텐츠 시장은 매년 급성장하며 디자인 수요가 늘어가고 있다. 여기에 대중들의 기준이 점점 높아짐에 따라, 콘텐츠도 보다 디자인된, 더 나아가 브랜딩 된 콘텐츠로 상향 평준화되고 있다. 이러한 콘텐츠들이 시장에 쏟아져 나오기 위해서는 수많은 디자인 인력이 필요하다. 그에 따라 수요 못지않게 공급 또한 증가한다. 디자인 툴을 다룰 줄 아는 개인 크리에이터, 프리랜서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디자인을 할 줄 안다는 것은 이제 보편적 능력에 가까워졌다.
그래서 디자인 회사들은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전략적으로 선택하고 있다. 대체 불가능한 작업물을 만들어냄으로써 몸값을 높이거나, 더 싼 가격에 더 많은 작업을 해내야 한다. 다시 말해 압도적인 선도자가 되거나, 디자인 공장이 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두 가지 길 모두 쉽지는 않기에 많은 디자이너들이 야근을 달고 산다.
디자이너에게 있어 이러한 상황은 아주 큰 위험 요소다. 왜냐하면 디자인 작업의 이유를 단단하게 세울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시간에 쫓기며 시안 찍어 내기를 강요받는 디자이너는 경력을 떠나, 디자인 철학과 멀어질 수밖에 없다. “이 디자인은 왜 이렇게 하셨나요?” 브랜드 디자이너로 일하며 자주 듣는 질문이다. 왜 이 폰트를 사용했는지, 왜 이 컬러를 사용했는지, 왜 이런 모양과 단어를 사용했는지 등 아주 사소한 디테일까지도 설명해야 한다.
이렇듯 디자인은 내부 사용자나 외부 고객에 상관없이 모두를 위한 소통 수단이다. 그리고 소통은 디자이너가 컬러, 폰트, 레이아웃, UI/UX, 일러스트, 아이콘 등 디자인 언어 속에 의도한 메시지를 심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클라이언트 혹은 상급자에게 “이 디자인은 왜 이렇게 하셨나요?”라는 질문에 그냥 예뻐서요라고 하거나, 그냥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됐다고 대답할 수 있을까? 나는 디자이너가 된 후, 줄곧 어떻게 하면 더 좋은 디자인을 할 것인가, 어떤 디자이너가 좋은 디자이너인지 늘 고민해왔다.
다행히 올해는 그 질문에 작은 실마리를 찾았다고 생각한다. 단지 기술적으로 완성도 있어 보이는 디자인을 만드는 디자이너가 아니라, 철학을 바탕으로 이유 있는 디자인을 해야 한다. 누군가를 설득시킬 수 있는 디자인을 한다면 결코 대체될 수 없는 디자이너가 되는 것이다.
디자이너는 반드시 자신의 작업에 대해 설명해야 할 때가 온다. AI가 그림, 음악과 같은 예술 영역의 일부를 대체하기 시작한 지금, 디자이너가 작업의 명분과 이유도 설명하지 못하고 테크닉만 앞세운다면, 과연 언제까지 디자이너로 일할 수 있을까? 디자이너로서 오래 일하기 위해 우리가 집착해야 할 것은 시각적 아름다움이나 기술적 고도화뿐만이 아니다. 그에 앞서 이유 있는 디자인을 해야 한다. 명분이 바로 선 디자인을 한다면, 디자이너라는 이름으로 오래 활동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브랜딩에 대한 관심이 늘어가고 있는 걸 느낄 수 있다. 특히 작은 기업이나 개인도 개성 있는 브랜딩을 선보이며, 시장에 신선한 파장을 주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다. 분명 좋은 현상이지만, 브랜드 디자이너의 관점에서 보면 아쉬운 부분도 있다. 장기적으로 진화하는 브랜드를 담아낼 계획이 없는 브랜드 컨셉이 많다는 것이다.
특히나 트렌드를 맹목적으로 쫓는 컨셉이 그렇다. 물론 트렌드를 반영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트렌드는 현재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몇 년 혹은 몇십 년 후의 미래를 바라보는 브랜드라면 다르다. 결국은 과거가 될 현재의 트렌드를 컨셉으로 잡는다면, 오래도록 시장에서 존재하기 힘들 것이다. 올해 여러 브랜딩을 작업하며 느낀 점은 브랜딩에는 완성이 없다는 것이다. 브랜드는 하나의 인격을 빚어내는 일과 비슷하다. 이를 페르소나 매니지먼트(persona management)라고 부른다. 한 사람의 인격과 성격, 외모가 고정된 상태가 아니듯 브랜드도 진화한다.
브랜드는 시장의 변화에 맞추어 변하기도 하고, 사용자들의 요구를 반영하여 변하기도 한다. 변화가 필요한 시점에 브랜드의 컨셉은 유연하게 진화할 수 있어야 한다. 실제로 시장의 변화에 맞추지 못해 도태되어가는 브랜드를 종종 볼 수 있다. 이는 마치 옷을 갈아입어야 할 때, 갑옷처럼 아주 무겁고 단단한 것을 입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본질은 지켜야 한다. 브랜드의 컨셉을 바꾸는 것과 철학을 바꾸는 것은 아예 차원이 다른 일이기 때문이다. 브랜드를 구성하는 근원은 철학이다. 그 철학이 확장되어 명시되는 것이 브랜드 혹은 기업의 비전(Vision)이고, 미션(Mission)이다. 손바닥 뒤집듯 의견을 바꿔 본질을 흐리는 사람을 신뢰할 수 없듯이 브랜드도 마찬가지다. 브랜드 디자이너는 이를 항상 염두에 두고 브랜드를 진화시켜야 한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마케팅과 브랜딩을 정확히 구분하지 못한다. 심지어 마케터나 브랜딩을 하는 사람들도 두 가지를 혼재하여 사용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물론 겹치는 부분도 있지만, 마케팅 차원에서 실행하는 업무와 브랜딩 차원에서 실행하는 업무는 다르다. 그래서 브랜드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브랜딩과 마케팅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두 가지를 구분하면 브랜드 성장 단계에 따른 전략을 수립하고 업무를 세분화하여 실행할 수 있다.
먼저 브랜딩은 모호한 개념을 정의하고 수집하여 하나의 맥락을 만드는 일이다. 반면 마케팅은 브랜드의 존재를 알리고 고객의 관심을 끄는 것이 중점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케팅과 브랜딩 사이에 상하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브랜딩과 마케팅은 교집합을 가진 수평적인 영역이다. 그럼에도 브랜드는 의도를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하므로, 브랜드를 만들어 가는 사람이라면 이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브랜딩 디자이너로서 클라이언트와 인터뷰할 때, 브랜딩과 마케팅을 혼재하여 겪는 어려움이 있다. 특히 어떻게든 브랜드를 더 알려야 한다는 조급한 생각은 브랜드의 맥락을 해칠 수 있다. 그렇기에 브랜딩 관점으로 브랜드를 구축해가는 것이 장기적으로 중요한 일임을 계속 상기시켜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