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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제 일이 아니에요”

 

항상 돈과 사람이 부족한 스타트업은 모든 직무를 뽑고 싶어 하지만, 다 뽑을 수 없다. 가령 디자인 직군만 해도 브랜드 디자인, 광고 디자인, UX/UI 디자인 등 세부적인 역할을 다양하게 나눌 수 있다. 이들은 각자의 역할과 강점이 다르지만, 모든 사람을 전부 다 뽑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스타트업에서 일하는 우리는 하나의 고정된 일만 하는 게 아니라 대개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심지어 같은 이름을 가진 직무라고 해도 같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회사마다 배정되는 역할이 다를 수 있다. 가장 편차가 큰 직무가 PM이다. 일단 PM이라는 약자 자체가 ‘Product Manager’일 수도 있고, ‘Project Manager’일 수도 있어서 혼란의 여지가 있다. 게다가 어느 회사에서는 PM이 사업 전략 기획과 비즈니스 정책을 주로 다루는 반면, 어느 회사에서는 사업 전략과는 관계없이 앱 서비스 기획자에 가깝기도 하다.

 

이렇게 역할 구분이 모호하고 한 사람이 여러 역할을 맡는 상황이 많다 보니 자기 역할을 한정 짓고 규정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기 쉽다. 많은 분이 "제가 개발자인지 기획자인지 모르겠어요"라거나 "저는 디자이너로 들어왔는데, 마케터 일도 하고 있어서 힘들어요"라는 식의 푸념으로 그러한 갈망을 드러내곤 한다. 디자이너인데 디자인보다는 마케터처럼 광고 집행에 쓰는 시간이 더 많고, 개발자인데 개발하는 시간보다 서비스 기획자의 기획안에 피드백 주고 수정하는 시간이 더 많을 때 우리는 '현타(현자타임)'를 느끼고 자신이 제대로 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지 의심한다.

 

여기서 선택이 갈린다. ‘역할을 더욱 명확하게 구분 짓고 규정할 것인가?’, ‘모호한 역할을 감수하고 여러 역할을 감수할 것인가?’. 만약 전자라면 내가 하고 싶거나 잘하는 일에 집중하도록 다른 일은 하지 않겠다고 선언할 것이고, 다른 사람의 역할과 내 역할을 열심히 구분 지을 것이다. 후자라면 네 일, 내 일의 구분 없이 자기 일처럼 하지만 주먹구구식으로 일을 처리하게 될지 모른다. 각각 장단점은 있지만 굳이 둘 중 하나를 고른다면 나는 후자의 방식이 낫다고 생각한다.

 

왜냐? 그것이 스타트업만이 가질 수 있는 무기이기 때문이다.

 

내 일 너 일
 

성장, 속도, 혁신을 가로막는 것들

2차 세계 대전 당시 적국에 잠입해 ‘조직을 망치는 방법’으로 유명한 CIA의 사보타주 매뉴얼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 회의록, 결의문, 의사소통에 사용되는 용어의 선정에 대하여 승강이하라.
  • 신속한 의사결정을 한다고 결재 라인을 무시하고 직접 보고하지 못하도록 하라.
  • 결정의 타당함을 걱정하고, 실행사항이 권한 내에 있는지, 상급조직의 정책에 위배되는 것은 아닌지 문제를 제기하라.
  • 가능하다면 일거리를 위원회에 넘겨 오래 논의하게 만들고, 위원회는 결코 다섯 명 이하로 만들지 마라.

 

이러한 매뉴얼의 공통점은 사안의 본질/결과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과정 그 자체에만 집중한다는 점이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규정하고, 절차를 거치고, 과정이 정당한지를 걸고넘어지게끔 만들어 놓았다. 아무리 똑똑하고 열정적인 사람도 이런 환경에서는 빛을 낼 수가 없다.

 

대기업이나 유니콘 기업처럼 많은 자원을 가지고 있는 경쟁사들과 싸워 이기려면 스타트업은 어떻게 해야 할까? 그들은 이미 자금, 고급 인재, 기술, 네트워크 등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이에 대해 네이버, 배달의민족 등을 거쳐 그로우앤베터를 창업한 천세희 대표는 “모두에게 동등한 자원인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렸다고 이야기한다. 몇 겹의 보고 체계와 촘촘한 행정 절차, 무거운 의사결정 프로세스를 가진 공룡들을 이기려면 더욱 빠르게, 시간을 밀도 있게 보내야 한다.

 

그런데 정작 스타트업이 체계를 따지느라 속도를 잃으면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건 제 일이 아니에요. 쟤 일이에요."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스타트업에 와서 역할과 권한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워낙 한 사람이 많은 역할을 그때그때 소화해야 하는 환경이다 보니 더더욱 역할 구분과 체계에 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많이 하는 실수가 “기획자는 원래~”, “디자이너는 원래~”라는 말과 함께 “그러니까 이건 제 일이 아니고~”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토스에서는 어떻다더라, 구글에서는 원래 이렇게 한다더라 하면서 자기 스스로 고정관념을 강화하게 된다.

 

그 결과는 치명적이다. 서로 역할과 권한 범위를 규정하고 시시비비를 가리다 보면, 프로젝트의 역학관계가 아주 복잡해지고 쉬운 일도 어려워진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회사에 OOO라는 어떠한 프로젝트가 생겼다.

A: 이건 B팀에서 해야 할 일인 것 같은데요.

B: 제가 볼 때 앞부분의 큰 기획은 A팀에서 잡아줘야 저희가 일을 진행할 수 있어요.

A: 저희는 비즈니스를 담당하는 팀이고, OOO 프로젝트는 사업보다는 제품의 영역이니 C팀에서 하는 게 맞겠는데요.

C: 그럼 A팀이 전체적인 방향을 잡아주면 거기에 맞게 기획을 짜서 B팀에 전달할게요. 하지만 결과물에 대한 데이터 분석은 저희 쪽보다는 사업 쪽 영역이니 A팀에서 하셔야 할 것 같은데요?

B: 그럼 어떤 데이터를 봐야 할지는 A팀에서 저희한테 전달해주세요.

A: 데이터 분석은 B팀에서 할 일 아닌가요? 저희는 사업 방향과 정책을 맡은 팀이지, 데이터 분석은 저희 일이 아니에요.

 

대부분의 사안은 이렇게 여러 이해관계자가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애초에 서로의 권한을 명확히 나누기 힘들다. 이렇게 여러 사람에게 역할과 권한을 나누어 놓을 경우 A는 B가 일을 전달해줄 때까지 대기하게 되고, 고속도로 정체 현상처럼 B는 C에게, C는 또 A에게 일을 넘겨주며 업무 버퍼가 반복해서 생긴다.

 

만약 그 과정에서 A가 B의 업무 권한을 조금 침범하면 B는 그 시시비비를 따지느라 절차의 정당성에 대해 걸고넘어지게 된다. 한술 더 떠서, 그 누구의 일도 아닌 애매한 일이 생길 경우 ‘다음 프로젝트에서는 애매한 부분이 없도록 좀 더 세세하게 역할을 나누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덕분에 다음 프로젝트는 역학관계가 말할 것도 없이 더 복잡해진다.

 

게다가 동료 간의 관계도 틀어지기 쉽다.

A: 아니, B팀은 데이터를 직접 다루면서 분석도 할 줄 모르나? 하나하나 알려줘야 한다고?

B: 비즈니스 영역에서는 제품 기획도 당연히 할 줄 알아야 하는 건데, 원래 대기업에서는 다 그렇게 하는 데 이 사람들은 정말 무능력하다.

C: A, B팀은 자꾸 자기 팀 일을 우리 팀에 넘기려고만 해. 독박 쓰지 않으려면 우리 권한을 침범하지 말라고 말해야지.

 

 

그로스 마인드셋(Growth Mindset)

이러한 사고방식은 개인의 성장을 가로막고 조직을 아주 느리게 만든다. 사보타주 매뉴얼의 공통점은 결과나 목표보다 절차적 정당성에만 에너지를 쏟게 만드는 점이다. 이 꼴이 딱 그렇다. 애초에 사람도 얼마 없는 스타트업에서 네 일, 내 일을 나눈다고 명확하게 나눌 수 있는가? 매 상황마다 내 일이 아닌 수많은 일들을 해야만 하는 상황인데 가능하지도 않다.

 

개발자는 개발만 하면 되고, 디자이너는 디자인만 하면 되고, 기획자는 기획만 하면 될까?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물론 이상적으로는 각자가 자신의 전문 영역에 집중할 수 있어야겠지만, 대체로 잘 크는 스타트업은 사업이 성장하는 속도가 너무나 빠르기 때문에 조직 내 직군을 세분화하고, 새로운 사람을 채용하고, 기존 업무를 재분배하는 시스템이 성장 속도를 따라가기 힘들다. 겪을 수밖에 없는 진통이라는 뜻이다.

 

당장 배가 가라앉을 판인데 갑판에 뚫린 구멍을 손가락질하며 “이건 제 일이 아니에요. 갑판을 담당하는 담당자가 원래 이런 일을 하는 거예요”하고 보고만 있을 것인가? 당장 선원이 세 명뿐인데? 사무실에 음식물 쓰레기가 썩어가는데 그냥 인상 찌푸리고 “이런 건 경영지원 담당자가 할 일이야”라고 불평만 할 것인가? 경영지원 담당자는커녕 한 명이 인사, 총무, 재무, 회계, 정부과제, 영업까지 다 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체계 없이 주먹구구로 계속 일하라고?

스타트업이니까 대충 주먹구구로 일해도 된다는 취지는 아니다. 일을 아마추어처럼 대충 하는 것과 역할/권한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건 조금 다르다고 생각한다. 축구에서는 공격수와 수비수가 상대적으로 명확하게 나뉘지만, 농구는 모든 사람이 공격도 하고 모든 사람이 수비도 한다. 그렇다고 해서 농구가 주먹구구식으로 대충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물론 딱 맞는 비유는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요지는 역할/권한을 따지느라 일의 본질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을 경계하자는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정상적인 사람들은 자신의 역할과 권한 범위를 제대로 정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내 역할이 모호할 경우 일하는 입장에서 '나는 뭐 하는 사람이지?'라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고, 어느 업무에 집중해야 할지도 정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 역할/권한이 서로 중복되면 서로 ‘상대방이 하겠거니’ 생각하고 아무도 그 일을 하지 않는 경우가 생긴다. 그러니까 역할을 명확하게 구분 지으려는 건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대응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스타트업은 환경 자체가 역할과 권한 구분을 딱 나누기 어려운 환경이다. 그러니 자꾸만 내 역할을 규정짓고 싶어 하고, 그게 엇나가서 “디자이너는 원래~”, “개발자는 원래~” 하며 실랑이를 시작하게 된다. 결국엔 조직 전체가 네 일, 내 일을 따지느라 병이 든다.

 

언제나 적정선이 중요한 것 같다. 스타트업이라고 아무 일이나 닥치는 대로 하는 ‘잡부’가 최선인 것은 아니다.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괜찮은 스타트업이라면 차근차근 역할과 권한을 구분해 나갈 것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조바심에 네 일, 내 일을 구분 짓느라 과하게 에너지를 쏟고 있지 않은지 조심해야 한다. 과정에만 집중하지 않고, 결과를 얻기 위해 모두가 힘을 모아야 회사와 나의 성장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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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토v

스타트업과 직장 생활에 대해서 주로 글을 씁니다. 스타트업에서 조직 관리를 맡고 있으며 집필, 기고, 강의, 컨설팅, 코칭 등을 함께 진행하기도 합니다. 스타트업을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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