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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러 커뮤니티에서 활동하기 시작할 때의 이야기다. 어떤 셀러 분이 디자인한 상세페이지를 보았다. 그분은 '정말 오랫동안 공들여 준비했다'라고 말을 붙이며 보여줬다. 신선 식품과 관련된 상세페이지였다. 본 순간 얼어붙었다. 정말 촌스러웠다. 오랜 시간을 들인 게 맞나 의심이 될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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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러 커뮤니티에서 활동하기 시작할 때의 이야기다. 어떤 셀러 분이 디자인한 상세페이지를 보았다. 그분은 '정말 오랫동안 공들여 준비했다'라고 말을 붙이며 보여줬다. 신선 식품과 관련된 상세페이지였다. 본 순간 얼어붙었다. 정말 촌스러웠다. 오랜 시간을 들인 게 맞나 의심이 될 정도로.
“디자이너에게 다시 맡기는 편이 낫지 않겠어요?” 이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당시 나는 온라인 셀러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었다. 그 전에는 회사를 다니면서 스타트업들을 대상으로 한 디자인을 주로 했었다. 많은 분들이 공감하겠지만, 스타트업 디자인은 말로 설명하기 힘든 특유의 클리셰가 있다. 깔끔하고 세련된 디자인, 산뜻한 말투, 심플하고 매끄러운 UI까지. 테크 스타트업에 한정시키지 않더라도, 스타트업은 스타트업 나름의 디자인이 있다. 티가 확 난다. 그리고 나는 '그런' 디자인에 굉장히 익숙해져 있었던 때였다.
문제의 상세페이지는 내가 겪어온 것과는 반대로 디자인되어 있었다. 디자인을 전공하지 않더라도, 누가 봐도 촌스럽다고 느낄만한 상세페이지였다. 이걸 디자인이라고 할 수 있나? 몇 가지 조언하고 싶은 마음을 오지랖이라 생각하고 접어둔 채 시간이 흘렀다. 그분은 디자인을 그대로 업로드했다. 시간이 지나고 나는 그 상세페이지를 온라인 채널에서 확인했다.
썸네일을, 상세페이지를 확인했다.
그리고 그분이 예전에 올렸던 다른 제품들도 찾아봤다.
머리를 꽝!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디자인을 할 줄 아는데 일부러 그런 거였구나. 결과적으로 말하면 그 셀러 분은 디자인에 대해서 어느 정도 기초 지식을 갖춘 분이었다. 뿐만 아니라 디자인 툴도 다룰 줄 알았다. 그걸 알게 된 건 그분의 다른 제품 상세페이지를 확인했을 때였다. 깔끔하게 고객들이 필요로 할 만한 정보들로 상세페이지를 잘 정리했다.
아니 그럼 그 신선식품 상세페이지는 도대체 왜 그렇게 디자인했을까.
그 이유는 직접 듣게 됐다.
잠깐 떠올려보자. 우리가 알고 있는 맛집. 특히 시장에서 유명하다는 맛집들은 대부분 투박하게 생겼다. 어떤 음식점들은 한국식 네모 간판에 대표님들의 사진을 대문짝만 하게 넣기도 한다. 전형적인 나무 테이블, 세련됨과는 거리가 먼 인테리어, 방송 출연 사실을 알리는 빛바랜 현수막들까지. 맞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디자인되어있는 식당들에 대해 굉장히 익숙하다.
이런 업장을 운영하는 대표님들 모두 투박함을 일부러 유도했다고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촌스럽다고 해서 모든 음식점이 잘되지도 않는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런 투박함을 일부러 디자인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이다.
유머러스함과 가벼움으로 사람들을 사로잡는 B급 마케팅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정말 말 그대로, 있는 그대로의 촌스러움을 연출하는 것이다.
온라인에서 사람들이 투박하고 촌스러운 '신선식품' 상세페이지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 익숙했던 맛집들의 촌스러움을 고객들은 어떻게 느낄까? 깔끔하고 세련된 브랜딩은 사람들에게 청결하다, 믿을만하다는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 투박한 상세페이지는 이 부분에서는 어필이 힘들지 몰라도(어려울지 몰라도), 식품업을 전문으로 하는 특유의 분위기를 잘 나타낼 수 있다.
(1) 제품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디자인을 신경 쓰지 못하는 업장 이미지 (2) 상세페이지 곳곳에 보이는 믿음직스러운 사장님의 사진 (3) 3대가 운영했기 때문에 일부러 나이 들어 보이게 디자인 (4) 직설적인 어투(전문 용어 설명)와 사진으로 '직판' 시각화 |
이 상세페이지의 디자인이 제품 판매에 큰 힘을 준 것이다. 투박한 디자인은 세련된 디자인들 사이에서 눈에 한 번이라도 더 띌 수 있다. 굉장한 장점이다. 최저가라는 분위기를 낼 수 있다. 1차 생산업자가 파는 직배송이라는 느낌도 줄 수 있다. 말로 하는 것보다 강력한 것이 디자인의 힘이다.
일부러 깔끔하게 디자인하지 않는다. 디자인의 투박함을 넣되, 세일즈 퍼널의 내용대로 흐름을 짰다는 점도 나에게 충격이었다. 잘 들여다보니 강조하는 텍스트와 그 텍스트를 받쳐주는 다른 세부 텍스트들이 적절하게 잘 넣어져 있었다.
그리고 더욱 놀라웠던 사실은 상세페이지와 더불어 썸네일을 확인했을 때다. 해당 카테고리 안에서 어떤 제품도 이런 식으로 디자인하지 않았었다. 보통 셀러가 입점하게 되면 상위 노출을 목표로 제품을 업로드하게 되는데, 상위 1-2페이지까지를 기준으로 '완전히 새로운 썸네일'이었다. 손에 가득 식품을 들고 있는 사장님의 모습. 투박하게 써진 글자들.
이 상품은 대박이 났다. 너무 많이 팔려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리고 이 상품을 기점으로 같은 카테고리의 다른 신선 식품들의 썸네일과 상세페이지도 모두 바뀌었다. 다른 셀러들이 잘 팔리는 상품을 기준으로 디자인을 바꾸는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못생긴 얼굴을 잘 그리는 사람이 정말 잘 그리는 사람이라고. 나는 이 날을 기점으로 이런 프로페셔널한 못생긴 디자인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핀터레스트, 비핸스에 나와 있는 레퍼런스들은 이런 디자인을 잘 소개하지 않는다. 내가 소개했던 상세페이지 디자인들은 '핀'당하기보다는 실생활에서 쇼핑할 때 더 자주 접한다. 디자인 전문 레퍼런스 사이트에서 확인하는 이미지들이 대중들에게 외면받는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그 반대 접점에서 디자인된 브랜드도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
그전까지 나는 누가누가 더 예쁘게 디자인하는지에 대해서 신경을 써왔었다. 어깨에 힘을 딱 넣고, 레퍼런스를 찾아다니면서. 어떤 디자인이 더 깔끔하고 심플한지에 대해서'만' 고민해왔다.
이 사건 이후로 나는 디자인을 다르게 보게 됐다. 디자인에 힘을 덜고, 더 열린 눈으로 보게 됐다. '저렇게 디자인한 이유가 있을까?', '저 디자인이 의외로 호감을 사는 이유는 뭘까?', '디자이너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디자인했을까?'등을 생각하게 됐다.
디자이너가 의도를 생각하며 디자인을 시작하면 다양한 일이 일어난다. 디자이너의 개인적 취향에서 벗어나 새로운 디자인에 도전할 수 있게 된다. 다양한 전략을 시도할 수 있다. 만들고 나니 예전의 디자인과 비슷하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 시중에 팔리고 있는 디자인들에서 여러 가지 단서를 포착할 수 있는 눈을 갖게 된다.
보기에 예쁜 디자인은 눈에 띈다. 호감을 산다. 그리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 결과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질 수 있다. 수많은 명작들이 그렇다. 많이 알려지면 많이 소비된다.
하지만 심미적인 예쁨만큼 디자인 의도가 중요하게 여겨지는 카테고리가 있다. 오로지 예쁜 디자인이 통하는 카테고리가 있고, 그렇지 않은 카테고리가 있다. 한눈에 봐도 깜짝 놀랄 정도로 예쁜 디자인이 있다면, 그 반대편엔 친근하게 다가가 안심하도록 만드는 디자인이 있다. 디자인이 고객들에게 어떤 이미지를 줄 것인지 '의도'를 생각하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고객이 알아채지 못하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클리셰 디자인으로,
진부하고 촌스럽게, 그러나 실제 목적을 달성하는 실용적인 디자인도 있다.
이 디자인들을 생활력 있는 디자인이라고 부른다.
디자인에 대한 눈을 넓히자. 세상엔 좋은 디자인들이 너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