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에서 십몇 년 전 PRD를 처음 접한 이후로 어디를 가나 저는 PRD를 작성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반대로 어느 곳에서도 ‘제대로’ PRD를 쓰는 조직을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그런 조직에서 일하는 방식, 제품을 만드는 과정은 대체로 비슷합니다. 스크린 플로우를 그리고, 여기에서 출발해 피그마나 스케치로 프론트 제작을 먼저 하고 있었습니다. PRD에 대해서는 ‘그런 건 느리다’ 라거나 ‘이렇게 하는 게 더 빠르고 잘한다’는 입장이 많았고, ‘PRD 같은 건 삼성전자 정도 되는 조직에서나 쓰는 거’라는 반응도 있었습니다. 그런 이들을 위해 오늘은 PRD를 작성하는 목적은 무엇이고, 누가 써야 하는가에 대해 얘기해 보겠습니다.
스타트업은 부족이 기본값이다 보니 그들이 만드는 제품은 대부분 불완전하고 불편합니다. 그러다 보면, 항상 CS와의 전쟁을 치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저도 제품을 개발할 때에 일부 상황에 “CS로 처리하자”고 쉽게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한번 잡아놓고 나면, 곧 이런 일들은 계속 CS의 부담으로 남아버리고는 합니다. CS가 버티지 못하고 박살이 난다면 모를까, 문제를 꾸역꾸역 잘 막아내기 시작하면 이 상황은 영원히 지속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의 글감을 정했습니다. “CS가 탁월하면 프로덕트가 무능해진다.” 게을러진다라는 표현이 좋을지 잠깐 고민을 했었습니다만, 총체적인 상태로는 무능이 더 어울릴 것 같습니다.
창업자들은 투자를 받기 위해서 해야 할 말이 너무 많습니다. 반대로 초기투자자들이 ‘지금 여기 데모데이’에서 듣고 싶은 말은 사실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고 싶은 말과 듣고 싶은 말의 간격, 저는 이것을 커뮤니케이션 간격이라고 부릅니다. 숙련된 ‘평가 노동자들’에게도 대표님들이 작성한 문서나 발표를 이해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일’상의 AI라는 시리즈에 참여해 투자자와 창업자의 ‘커뮤니케이션 간격’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생성형 AI가 이들 사이 간격을 줄여줄 선물 같은 존재가 되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